런던에서, 혹은 유럽 어디에서든 저가항공을 타고 바르셀로나로 날아온다면 근교 히로나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온다. 올리브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은 변함없는데, 건물 담벼락에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는 국가다”라고 적힌 낙서들이 4년 전에 비해 부쩍 늘었다. 하긴, 스페인이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바로 전날에도 바르셀로나 시내 한복판인 카탈루냐 광장에서 카탈루냐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니 그럴 만도 하다(카탈루냐 독립 요구의 배경은 88쪽 기사 참조).
아찔한 카탈루냐 독립의 스펙터클스쳐 지나는 창밖의 낙서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우리는 다른 유니폼을 입고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했다”는 FC 바르셀로나(바르샤) 고위 관계자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국기를 가슴에 달고 치르는 큰 대회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스페인이 지난 유로대회 우승 이후 이번 월드컵까지 휩쓸면서, 세계 언론들은 그 이유를 ‘카스티야’와 ‘카탈루냐’의 완전한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짚었지만, 카탈루냐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스페인 대표팀은 ‘바르샤팀’이라 할 정도로 푸욜을 비롯한 바르샤 선수 8명이 핵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스페인 우승의 향방을 결정짓지 않았던가. 이 말 속에는 그 선수들이 스페인 국가대표팀이라기보다 ‘카탈루냐 자치정부팀’이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을 거라 짐작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 그 속내를 직접 듣고 싶었다.
FC 바르샤의 홈구장 캄프 누는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곳. 더욱이 맨유가 그해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FL)-축구협회(FA)컵-챔피언스리그 3관왕인 ‘트레블’의 위업을 달성했으니 캄프 누는 맨유팬들에게 일종의 ‘성지’다. 10년째 맨유팬으로서 마치 ‘성지순례’하듯 이곳을 찾은 나는, 4년 전에 왔을 때는 FC 바르샤의 홈경기를 직접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는 긴 도보여행을 떠나기 전 일부러 바르셀로나를 들른 이유는 순전히 8월25일 저녁 캄프 누에서 FC 바르샤 대 AC 밀란의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월드컵 우승은 둘째치고,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유를 무참히 꺾어버린 그들의 경기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라이벌 의식이랄까.
캄프 누에서 직접 본 경기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역시 메시는 명불허전. 주장 완장을 물려받고 후반전 시작과 함께 교체 투입된 그는 날렵하게 피치를 휘젓고 다녔다. 메시가 아쉽게 빗나가는 프리킥을 날릴 때마다 캄프 누를 들썩이는 9만 관중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전반 다비드 비야의 골로 앞서간 바르샤는 후반 AC 밀란의 호나우지뉴에게 한 골을 내줘 결국 승부차기로 경기에서 이겼다. 경기 뒤 호나우지뉴의 인사에 메시에게 대하듯 함성과 박수로 격려하는 관중. 과거 자신들의 영웅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 그들이 아름다웠다.
경기가 끝날 즈음 서둘러 근처의 ‘스포츠 바’로 자리를 옮겼다. 경기장 근처 바와 펍에서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열성팬들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나는 여기서 바르셀로나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 하나. 카탈루냐의 독립은 물론, 월드컵에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처럼 카탈루냐가 따로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바르샤를 응원하지 않는다는 여교사의 속내. 왜냐고 물었더니 “카탈루냐 정신은 바르샤팀에만 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카탈루냐에는 자랑스러운 파블로 카잘스와 피카소가 있고, 또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는데, 외지인들이 오직 바르샤팀에서만 카탈루냐의 존재를 보고 가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거다. 바르셀로나 시민들 역시 바르샤팀을 응원하는 것으로 카탈루냐 출신임을 증명하지만, 정작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행동에는 무심하다고 비판한다.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바르샤팀은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자치권을 증명하는 하나의 스펙터클인 셈. 하지만 그녀 역시 바르샤팀으로 인해 카탈루냐라는 작은 ‘국가’가 지구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엔 만족해했다. 지난해 12월 주민 94%가 카탈루냐 독립에 찬성하는 투표를 할 만큼, 정말 그들은 “다른 유니폼을 입고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무릎 꿇어오랜 기간 바르샤의 운영을 책임진 페란 소리아노는 에서 이렇게 밝힌다. “팀의 성공을 일회성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브랜드의 내용을 영원한 가치로 채워야 한다. 그런 변치 않는 가치들은 세계 전역의 팬들을 끌어모을 것이다.” FC 바르샤의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란, 곧 카탈루냐의 자치권, 정치적 시민권이 아닐까. ‘소시오’(시민 구단주)로 이뤄진 시민구단 FC 바르샤가 곧 카탈루냐가 되는 운명 공동체. 스페인 17개 자치지역에서도 독립적 성향이 강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축구팀들이 특히 그렇다. 유럽 대부분의 축구클럽은 지역 공동체와 늘 운명을 함께했지만, 지역적 숙원을 클럽의 최대 가치로 삼아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가 돼버린 축구팀이 바르샤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또 하나 고백하건대, 솔직히 나는 FC 바르샤 유니폼 가슴팍에 기업 로고가 아닌 유니세프 마크가 달려 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매년 150만유로를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것이나, 메시가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것이 혹여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더라도, FC 바르샤는 어떤 클럽보다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바람직함을 증거한다. 그래, 오늘만큼은 FC 바르샤 팬이 되기로 하자.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고, 축구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FC 바르샤 ‘짱드셈’. 어차피 여기는 바르셀로나, 하루쯤 라이벌팀 팬이 된다고 10년 맨유팬 충성이 어디 가겠는가.
바르셀로나(스페인)=이지안 축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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