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첫승, 갈망의 끝

어깨가 수술 자국으로 얼룩진 엄정욱, 타자로 전향했던 김광삼, ‘먹튀’ 비난받던 박명환…
등록 2010-04-23 14:39 수정 2020-05-03 04:26
오랜 시련 끝에 올해 첫 선발승을 올린 투수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엄정욱, 박명환. 김광삼. 연합사진

오랜 시련 끝에 올해 첫 선발승을 올린 투수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엄정욱, 박명환. 김광삼. 연합사진

“저, 승리투수가 맞아요?”

엄정욱(29·SK)은 경기가 끝난 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난 4월11일 서울 목동에서 열린 넥센과의 경기에서 5이닝 1피안타 1실점으로 선발승을 따낸 직후였다.

1694일의 기다림, 엄정욱

엄정욱이 선발투수로 승리를 따낸 것은 지난 2004년 8월10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현대(넥센 전신)와의 경기 이후 5년8개월, 날수로 따지면 무려 2070일 만이었다. 가장 최근에 승리투수가 된 것도 2005년 8월21일 수원 현대전 구원승 이후 4년8개월, 날수로 따지면 1694일이 걸렸다. 스물다섯 살에 승리를 맛본 뒤 서른 살이 돼서야 다시 그 맛을 봤다.

엄정욱은 언제나 ‘미완의 대기’였다. 2000년 쌍방울에 입단할 때 시속 16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로 화제를 모았다. 2004년에는 SK 유니폼을 입고 100이닝을 넘게 던지며(105⅓이닝) 7승5패1세이브를 거뒀다.

하지만 그해뿐이었다. 2005년 1승에 그쳤고, 2006년 이후에는 수술만 3번이나 받았다. 그의 팔꿈치와 어깨는 칼자국투성이다. 엄정욱은 고통스런 재활 과정을 이겨내고 지난해부터 다시 마운드에 서며 재기 가능성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투수에 이름을 올렸다. 프로 데뷔 10시즌 만에 꼭 10승을 채운 것도 의미가 컸다.

엄정욱이 승리투수가 되던 날, 공교롭게도 또 한 명의 사연 많은 투수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LG 김광삼(30)이 그 주인공이다. 김광삼은 이날 서울 잠실 라이벌 두산과의 원정경기에서 5⅓이닝 동안 9안타 4실점(3자책점)으로 선발승을 따냈다. 김광삼이 승리투수가 된 것은 2005년 9월28일 SK와의 경기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4년6개월여, 날짜로 따지면 1656일 만의 승리였다.

김광삼은 투수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다시 투수로 전향한 곡절을 가졌다. 신일고를 졸업하던 1999년 LG에 입단한 그는 투타에 모두 재능이 있었지만 팀 사정상 투수를 선택했다. 신인 시절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상무를 다녀온 뒤 시속 150km의 빠른 공을 선보였고, 마침내 2003년 선발 자리를 꿰찼다. 그해 7승(9패)을 거뒀고, 2004년과 2005년에는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8승(7패)과 7승(7패)을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통산 23승 가운데 그 3년 동안 22승을 따냈다.

그러나 2006년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투수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고심 끝에 김광삼은 2007년 타자 전향을 선택했다. 신일고 재학 시절 우투좌타로 이름을 날린 만큼 가능성이 있다는 코치진의 권유였다. 하지만 경쟁이 심한 LG 외야진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는 지난해 7월 팔꿈치가 완전히 회복되면서 투수 복귀를 선언했다. 타격보다 마운드가 약한 LG에서 그의 존재를 더욱 반기는 쪽은 마운드였다. 실로 오랜만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 김광삼은 “타자로 전향했을 때 비웃던 말들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자리에 다시 설 것을 기대하며 노력했다. 막상 실현되니까 어려웠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감격해했다. 그는 올 시즌 몇 승을 거두는 것보다 100이닝 이상을 던지는 투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고질적인 어깨 통증에 시달린 박명환

과거엔 승리를 밥 먹듯 하던 에이스도 오랜만의 승리 앞에서는 벅찬 감동을 가누지 못한다. 1996년 데뷔해 지난해까지 통산 98승을 거둔 LG 박명환(33)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4월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5⅔이닝을 2실점으로 잘 막아 승리투수가 됐다. 2007년 8월10일 기아전 이후 2년8개월, 날수로는 973일 만이었다. 개인 통산 100승에 1승 차이로 다가선 것도 뜻깊었다. 박명환은 그동안 16경기에서 6패만 당했다. 승리투수가 된 뒤 백전노장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왔다. “고교(충암고) 시절 봉황대기 결승전을 치르는 것처럼 긴장했다. 오늘 내 투구에 100점 만점을 주고 싶다.”

박명환은 두산 시절이던 지난 2000년께부터 고질적인 어깨 통증에 시달렸다. 두산에서 LG로 이적한 뒤 첫 시즌이던 2007년 10승(6패)을 거뒀지만, 이듬해 5경기에서 3패만을 기록한 채 그해 8월 일찌감치 시즌을 접었다. 그리고 8년이나 괴롭혔던 어깨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는 지난해 6월 복귀했다. 그러나 이번엔 허벅지 통증이 문제였다. 4경기에서 승리 없이 1패만 기록했다. 평균 자책점은 2008년 8.61, 지난해 6.19에 이르렀다. 4년 동안 40억원을 받고 두산에서 LG로 이적한 선수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슬슬 ‘먹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올 시즌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며 비난을 잠재우고 있다. 비록 전성기 때의 구위는 아니지만 팀에서 투수 조장으로 후배 투수들을 이끌며 팀워크를 다지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엄정욱·김광삼·박명환처럼 힘겹게 1승을 보탠 투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1승에 목마른 투수도 많다. LG 서승화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통산 1승을 올린 게 전부다. 2004년 4월23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맛본 뒤 지난해까지 10패만 남겼다. 롯데 선발투수 이명우도 통산 1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