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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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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본토를 놀랜 한국산 ‘푸른 용’

체력·기술력 겸비해 프리미어리그 볼턴의 구세주로 떠오른 이청용…
영국팬들 스스로 ‘태극기 응원’ 나설 정도
등록 2010-03-26 11:31 수정 2020-05-03 04:26

지난 3월13일 볼턴과 위건의 영국 프리미어리그 30라운드 중계를 위해 선발 라인업을 확인할 때였다. “허허, 또 선발이네요.” 이재형 SBS스포츠 캐스터가 혀를 내차며 말했다. 볼턴 원더러스의 이청용은 1월17일 아스널과의 프리미어리그 22라운드에 출장한 이후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16경기를 소화했다. 한 경기를 제외하면 모두 선발 출장이었다. 축구협회(FA)컵 재경기와 연기된 리그 일정 때문에 2월에 빡빡한 일정이 몰려 있었지만 이를 모두 소화해낸 이청용이었다. 3~4일 간격으로 계속 경기에 투입된 꼴인데, 측면 윙어로서 이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선수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공격 포인트 기록 경신

볼턴의 투박한 축구에 염증이 나 있던 팬들은 ‘테크니션’ 이청용이 등장하자 대형 현수막을 경기장에 내걸며 반겼다. REUTERS/ PHIL NOBLE

볼턴의 투박한 축구에 염증이 나 있던 팬들은 ‘테크니션’ 이청용이 등장하자 대형 현수막을 경기장에 내걸며 반겼다. REUTERS/ PHIL NOBLE

체력이 떨어질 만도 한데, 이청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건전에서 절묘한 스루패스를 성공시키며 어시스트를 추가했다. 시즌 통산 5골과 8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최고 공격 포인트 기록을 또다시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고무적인 것은 이청용이 공격 포인트를 올린 경기에서 볼턴은 10승2무1패의 성적을 거뒀다는 점인데, 올 시즌 볼턴이 컵대회를 포함해 12승을 올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볼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청용은 이제 볼턴의 에이스다. 볼턴의 홈구장 리복 스타디움에서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는 장면이 이젠 낯설지 않게 됐다. 이청용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단 볼턴이라는 클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볼턴은 쉽게 표현해 프리미어리그에서 챔피언십(2부)리그로 강등되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팀이다. 모기업의 재정 악화로 부채가 많고, 최근 몇 년간 긴축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또 팀의 주포였던 니콜라 아넬카가 첼시로 이적한 2008년 1월 이후에는 계속 강등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볼턴이 처음부터 그랬던 팀은 아니다. 볼턴은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2001년 프랑스 대표 공격수였던 유리 조르카예프의 맹활약 속에 꽤 재미있게 경기를 한 팀이었고, 2002~2003 시즌엔 제이 제이 오코차가 볼턴 팬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으며 팀을 강등의 수렁에서 극적으로 건져냈다. 이후 볼턴은 샘 앨러다이스 감독(현 블랙번 로버스 감독)을 중심으로 중·상위권 강팀으로 올라설 수 있었고, 체격과 체력을 앞세운 피지컬 축구와 테크니션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무시 못할 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앨러다이스 감독이 팀을 떠난 시점과 맞물려 팀의 재정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다. 팀은 간판 선수들을 하나둘 팔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볼턴의 축구 색깔은 기술을 갖춘 선수 없이 오로지 롱볼 축구에 의존하는 형태로 바뀌며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재미없고 인기 없는 팀으로 전락했다. 강등을 당하지 않으려면 수비에 중점을 둔 채 세트피스 등에 의존하는 공격 형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테크니션들이 모두 다른 팀으로 떠나고 팀엔 샘 앨러다이스 감독 시절 피지컬 축구의 선봉에 섰던 선수들만이 남아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경기장 밖의 상황은 달랐다. 볼턴 팬들은 올 시즌 초부터 게리 맥슨 감독의 경질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이른바 ‘뻥축구’에 질려 있던 팬들이 폭발한 것이다. 몇몇 피켓에는 강등을 당해도 상관없으니 이젠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제2의 오코차를 원한다는 팬들의 구호도 있었다. 물론 오코차처럼 기술을 갖춘 윙어의 영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정 형편상 실력이 확실히 검증된 윙어를 비싼 가격에 영입하긴 힘들었다.

적은 금액에 입단할 수 있는, 가능성 높은 윙어들이 영입되기 시작했다. 스웨덴 대표 크리스티안 빌헬름손과 노르웨이 대표 다니엘 브라텐이 이 시기에 전문 윙어로 영입된 선수였다. 두 선수 모두 스피드와 기술, 크로스 능력을 병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맥슨 감독은 이 두 선수에게 좀처럼 선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니 시작부터 수비 가담 능력이 떨어지는 공격적인 윙어를 투입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들은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체 투입됐다. 감독에게 확실한 능력을 보여줘야 선발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교체 투입으로 성과를 거두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이들은 교체 선수로만 활약하다 팀을 떠났다.

방출된 테크니션들 자리 들어가 성공적 안착

이청용이 입단할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교체 투입을 통해 시즌 초반 대단한 퍼포먼스를 발휘하지 못할 경우 전문 교체 요원으로 전락한 뒤 머지않아 방출되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청용은 이를 극복해냈다. 프리미어리그 개막전과 3라운드에서 짧은 시간 교체 투입된 이후 정규 리그에선 좀처럼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다 약 한 달 만에 잡은 교체 투입 기회에서 짜릿한 역전 결승골을 기록한 것이다. 버밍엄 시티와의 7라운드 원정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이청용은 정확한 크로스 능력과 빠른 돌파 능력 그리고 결승골을 넣는 장면에선 절묘한 볼터치로 수비수 2명을 따돌리는 기술을 선보여 볼턴 팬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어진 토트넘전에선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경기 전 리복 스타디움 관중석에 태극기가 등장한 것이다. 한국인이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현지 볼턴 팬이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정규 리그를 80분밖에 소화하지 않은 선수에게 그만한 애정을 보인 것은 볼턴 팬들이 그만큼 테크니션의 부활에 목말라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청용은 고비마다 결정적인 공격 포인트로 팀을 구해내며 볼턴의 진정한 구세주로 거듭나고 있다. 이청용의 맹활약은 팀 수뇌부의 생각에도 큰 자극제가 됐다. 팬들이 원하는 아기자기한 축구를 하면서도 성적까지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는 게리 맥슨 감독의 경질과 오언 코일 감독의 부임으로 이어졌다. 코일 감독은 롱 패스보다는 숏 패스를 즐겨 쓰며 기술과 스피드를 갖춘 선수를 선호하는 감독이었다. 코일 감독의 부임과 함께 아스널의 재간둥이 잭 윌셔와 맨체스터 시티의 슬로바키아 대표 미드필더 블라디미르 바이스가 임대됐다. 두 선수 모두 기술이 뛰어난 테크니션들이다.

아기자기 정교한 플레이, 팀 분위기도 바꿔

새 감독의 성향은 이청용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롱패스가 많았던 맥슨 감독 시절엔 상대 수비수와 공중볼 다툼이 많아 체격이 왜소한 이청용으로선 체력적으로 불리하고 부상 위험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 맥슨 감독은 4-3-3 전형을 병행했기 때문에 이청용이 오른쪽 윙포워드로 출장할 경우 그러한 부담이 더 커지곤 했다. 하지만 코일 감독은 4-4-2 전형을 즐겨 쓴다. 측면 윙어로만 출장을 하게 되니 공격 때 롱볼 패스는 공격 투톱이 모두 해결해준다. 결국 코일 감독의 부임은 전체적으로 이청용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볼턴이 강등되지 않는 한 21살 이청용의 미래는 탄탄대로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프로에 들어왔기 때문에 병역에 대한 부담도 털었다. 출장 횟수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프리미어리그의 수많은 강호들과 경기력을 쌓으면 실력 향상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축구팬들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의 플레이를 감상할 일만 남았다. 박지성도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하나하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서로 다른 축구 스타일, 박지성과 이청용
상대방 장점 보완한다면 빅스타로 발돋움


박지성과 이청용(AFP 연합·AP 연합)

박지성과 이청용(AFP 연합·AP 연합)

이청용과 박지성, 두 선수는 경기 외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긴장을 별로 하지 않는 무덤덤함과 축구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라이프스타일은 빼닮았다. 축구 게임인 위닝 일레븐을 즐겨 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플레이 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이청용은 창의적이면서도 정확한 플레이를 즐기는 반면 박지성은 희생적이면서도 활동적인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청용은 결정적인 순간 팀 득점에 관계되는 직접적인 형태의 공격 포인트가 많은 반면 박지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활약 빈도가 높다.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서도 이청용은 단골손님처럼 화면에 잡히는 반면 박지성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두 선수의 상반된 스타일은 이제 두 선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청용은 웨이트트레이닝을 강화해 피지컬에서 밀리지 않는 수비력을 장착해야 하고 체력도 보완해야 한다. 이청용에게 박지성이 지닌 이미지가 결부된다면 그는 진정한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성 또한 이청용의 장점인 세밀한 패스와 드리블링 그리고 골 결정력을 보완한다면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릴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
최근 활약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다분히 존재한다. 이청용은 엄청난 경기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하며 체력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고, 박지성은 지난 3월 풀럼전에서 이청용처럼 정확한 크로스로 베르바토프의 골을 도우며 시즌 첫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겉으론 표현하지 않지만 한 무대에서 서로 자극받고 경쟁하는 듯한 결과들이 이어지고 있어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다. 이러한 흐름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까지 이어져, 두 선수가 서로 득점과 어시스트를 교환하는 멋진 광경이 연출될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지현 SBS스포츠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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