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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과 ‘조갈량’이 펼치는 가을의 전설

30여 년 전 충암고 감독-선수로 처음 만난 SK 김성근-기아 조범현 감독의 맞대결에 쏠리는 특별한 관심
등록 2009-10-22 18:03 수정 2020-05-03 04:25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하루 앞둔 10월15일 광주 무등경기장 다목적체육관에서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왼쪽)과 기아 타이거즈 조범현 감독이 악수를 하며 각자 우승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 연합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하루 앞둔 10월15일 광주 무등경기장 다목적체육관에서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왼쪽)과 기아 타이거즈 조범현 감독이 악수를 하며 각자 우승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지난 10월7일 SK와 두산의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린 인천 문학구장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두산은 1회와 2회 고영민과 최준석이 잇단 우월 솔로 홈런으로 승기를 잡았다. 두 타구는 담장을 맞거나 우익수에게 잡힐 것 같았지만 3루에서 우익수 쪽으로 강하게 분 동풍을 타고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인천은 대개 서해에서 서풍이 불어온다. 그런데 이날따라 동풍이 불었다. 동해상으로 다가온 18호 태풍 ‘멜로르’의 영향인 듯했다.

인천구장 풍향 바뀌며 두산 첫 승… ‘조갈량’의 신기?

바람에 힘입어 두산이 승리하자, 몇몇 야구담당 기자들은 ‘조갈량의 동풍’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서풍이 동풍으로 바뀌길 기다렸다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제갈량의 지략에 빗댄 농담이었다. ‘조갈량’은 조범현 기아 감독의 별명이다. 기아는 내심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시즌 막판 19연승을 거둔 SK보다는 두산이 올라오길 바랐다. 무엇보다 SK는 ‘야신’(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다. ‘야신’은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2패 뒤 3연승을 거두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야신’은 3차전 조명탑, 4차전 관중의 손, 5차전 우천 노게임 등 잇단 행운을 몰아가며 ‘조갈량의 동풍’을 잠재웠다.

‘적’으로 만났지만 김성근(67) 감독과 조범현(49) 감독의 인연은 남다르다. 잘 알려진 대로 둘은 사제지간이다. 그러나 이들의 33년 전 첫 만남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둘은 팔팔한 30대 청년과 까까머리 고교생으로 처음 만났다. 김 감독은 1976년 서른넷 젊은 나이에 당시 집 한 채 값인 600만원을 받고 ‘야구 신흥 명문’ 충암고 감독에 부임했다. 당시 대구 대건고에서 포수를 봤던 조 감독은 팀이 해체되면서 충암고로 전학왔다. 김 감독이 조 감독의 자질을 눈여겨보고 스카우트한 것이다.

1977년 어느 날이었다.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전에서 충암고는 에이스 기세봉이 9회말 1사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신일고에 2-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신일고 김남수에게 통한의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얻어맞고 눈물을 흩뿌렸다. 당시 기세봉과 호흡을 맞추던 충암고 포수 조범현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를 우짜노. 이제 우리 대학 우찌 가노” 하면서.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 역시 이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야구 인생에서 처음 눈물을 흘린 게 이때다. 두 번째는 LG 감독대행 시절이던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6으로 앞서가다가 9회말 1사 뒤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맞고 2승4패로 우승컵을 내줬을 때다. 그는 이렇게 딱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1977년 황금사자기에서 분루를 삼킨 김성근과 조범현은 이어 열린 봉황대기에서 일을 냈다. 8강전에서 보기 좋게 신일고에 설욕한 뒤 결승에서 광주진흥고를 5-0으로 완파하고 정상에 올랐다. 김 감독 야구 인생의 첫 우승이었고, 조범현은 최우수선수(MVP)의 영예를 안았다.

둘은 프로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조범현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OB베어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초대 김영덕 감독은 조 감독보다 김경문 현 두산 감독을 더 많이 기용했다. 김성근 감독은 지난 10월6일 플레이오프 기자회견 때 “당시 김영덕 감독은 조 감독이 뭔가 실수를 하면 ‘너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라고 핀잔을 줬다”고 밝혔다. 이 말은 조 감독의 고교 스승인 자신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은 1984년 김영덕 감독 후임으로 OB 사령탑에 올랐고, ‘애제자’ 조범현을 주전포수로 기용했다. 김 감독은 조 감독의 지도자 생활에도 도움을 줬다. 1996년 김 감독이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는 조 감독을 배터리 코치로 데려올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 감독의 SK 전임 사령탑이 조 감독이다. 조 감독은 2006년 SK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어 김 감독이 지휘봉을 이어받았다. 김 감독은 계약 기간 2년 동안 팀을 연거푸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우승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지난해 팀과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야인 생활을 하다가 2007년 10월 기아와 2년 계약을 맺고 지휘봉을 잡은 조 감독은 지난해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올해는 SK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정규리그를 제패했다. 설령 이번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재계약이 유력한 상황이다.

두 감독은 올 시즌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의미 있는 기록을 작성했다. SK는 시즌 막판 19연승을 기록했다. 23년 묵은 한국 프로야구 최다 연승(16연승·1986년 삼성) 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물론 대만(17연승)과 일본(18연승)을 넘은 아시아 신기록이다. 내년 개막전에서 승리하면 20연승에 이른다.

‘19연승’ ‘한 달 20승’ 금자탑 세운 팀끼리 격돌

기아 역시 대기록을 세웠다. 지난 8월, 프로야구 28년 사상 처음으로 한 달에 20승을 올렸다. 월간 최다승이자 20승4패로 월간 최고승률(83%)도 기록했다. 시즌 한때 꼴찌까지 추락했던 기아는 ‘여름의 전설’을 쓰며 12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조갈량’과 ‘야신’이 펼치는 한국시리즈가 시작됐다. 둘이 써내려갈 2009 가을의 전설은 훗날 어떻게 구전될지 궁금하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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