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프로야구 LG 트윈스가 파죽지세의 8연승으로 단독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LG 팬들 사이에선 “마침내 김성근의 저주가 풀리려나 보다”라는 말이 나왔다.
LG는 2002년 준우승 이후 지난해까지 6년 동안 우승은커녕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했다. 2006년과 지난해에는 창단 이후 첫 꼴찌의 수모까지 당했다. 야구계에선 LG의 추락을 ‘김성근의 저주’라고 부른다. LG는 2002년 시즌 초반 바닥을 헤맸다. 당시 이광은 감독은 사령탑에서 물러났고, LG 구단은 급한 대로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감독대행으로 승격시켰다. 김 감독은 망가진 팀을 추스려 정규리그 4위에 이어 포스트시즌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LG는 시즌이 끝나자 김성근 감독을 해고했다. 김 감독은 야인 생활을 하다가 2006년 말 SK 사령탑을 맡아 2007·2008년 연속으로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저주(詛呪·咀呪). 입에 담기에도 섬뜩한 단어다. 아무리 스포츠가 비정한 승부의 세계여도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닥치라고 비는 스포츠인은 없다. 그런데 유독 ‘저주’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는 종목이 있다. 프로야구다. 지구상에서 야구를 가장 좋아하는 한국과 미국, 일본에 모두 존재한다.
일본에는 ‘켄터키 할아버지의 저주’라는 게 있다. 1985년 한신 타이거스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흥분한 젊은 팬들이 연고지 오사카의 도톤보리강에 뛰어들었다. 팬들은 이어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 가게 앞에 있던 이른바 ‘켄터기 할아버지’ 상을 강에 집어던졌다. 켄터기 할아버지 상은 KFC 창업자인 할랜드 데이비스 샌더스를 실물 크기로 만든 조형물이다. 팬들은 켄터키 할아버지 상이 그해 타격 3관왕을 차지한 한신의 강타자 랜디 배스와 닮았다며 헹가래친 뒤 강에 던진 것이다. 한신은 그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이듬해부터 24년 동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염소의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 1945년 시카고 컵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월드시리즈 4차전 때 샘 지아니스라는 컵스 팬이 홈구장 리글리필드에 염소를 데리고 들어가려다가 저지당했다. 그는 “컵스에 저주를 내린다. 다시는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당시 최강 전력이던 컵스는 3승 4패로 고개를 떨궜고, 이후 64년 동안 우승은커녕 월드시리즈에도 오르지 못했다.
저주를 풀 절호의 기회를 놓치며 저주에 몸서리를 친 적도 있다. 시카고 컵스는 2003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플로리다 말린스에 3승 1패로 앞서며 58년 만에 꿈에 그리던 월드시리즈 진출에 1승 만을 남겨뒀다. 5차전을 내준 컵스는 6차전에서 7회까지 3-0으로 앞섰다. 그런데 운명의 8회 1사 2루에서 컵스의 좌익수 모이세스 알루가 잡을 수 있었던 파울 타구를 관중석에 있던 26살의 스티브 바트먼이 먼저 낚아챘다. 이후 컵스는 무엇에 홀린 듯 8점을 내주며 거짓말 같은 역전패를 당했고, 7차전마저 내준 뒤 저주에 울었다.
컵스는 염소의 저주를 풀기 위해 염소를 경기장에 데려와보기도 했고, 지아니스의 손자들을 경기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또 2005년에는 알루가 관중 때문에 놓쳤던 공을 폭파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컵스는 현재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4위로 올해도 저주를 풀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난 5월, 한신 팬들이 버린 켄터키 할아버지 상이 24년 만에 발견돼 일본 국민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색이 바랬고 안경도 없어졌지만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당시 켄터키 할아버지 상을 강물에 던졌던 젊은이들은 중년이 돼 노여움을 풀어달라며 사죄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신 역시 현재 센트럴리그 5위로 처져 있어 포스트시즌 진출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다. 한때 2위까지 올랐던 LG도 현재 7위까지 추락했고, 야구 팬들은 다시 ‘김성근의 저주’를 떠올리고 있다.
그래도 저주는 풀린다. 영원할 것 같던 ‘밤비노의 저주’와 ‘블랙삭스의 저주’도 1세기를 넘기기 전에 풀렸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라이벌이자 ‘저주의 진원지’ 뉴욕 양키스에 3패한 뒤 기적 같은 4승을 따냈다. 그리고 내친김에 월드시리즈에서 4연승해 86년 만에 저주에서 헤어났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시킨 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밤비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레드삭스 열성팬들은 2002년 2월, 베이브 루스가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뛰었던 1918년 당시 보스턴 근교의 윌리스 연못에 루스가 빠뜨린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를 건져 다시 연주하면 저주가 풀릴 것이라고 믿고 피아노 인양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저주가 풀린 팀은 어떤 계기가 있었으니2005년엔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88년 만에 저주에서 벗어났다. 화이트삭스는 1917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1919년 또다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하지만 주전 8명이 도박사들에게 매수당해 신시내티 레즈에 챔피언을 내주는 ‘블랙삭스의 저주’에 걸렸다. 화이트삭스는 2005년 비미국인 국적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주축이 돼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당시 화이트삭스의 불펜 코치가 바로 한국인 이만수 현 SK 수석코치다.
한국시리즈에서만 7전 전패를 당했던 삼성은 해태를 9번이나 정상에 올려놓은 김응룡 감독을 영입해 2002년 마침내 ‘달구벌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저주를 푼 팀은 어떤 계기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켄터키 할아버지 상을 건진 한신이 가장 먼저 저주에서 헤어날지도 모르겠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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