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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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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박지성, 하지만 기대된다

영국서 지켜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팀은 패했지만 현지서도 ‘3중 허파’ 박지성에 대한 관심 높아
등록 2009-06-11 16:37 수정 2020-05-03 04:25

박지성이 드디어 역사를 썼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출장한 그는 이제 더 이상 변방의 용병이 아니다.
나는 전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챔피언스리그 마지막 결승전을 영국에서 지켜봤다. 처음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주로 찾는다는 펍에서 경기를 보려 했다. 하지만 경기 2시간 전 이미 5파운드(약 1만원)짜리 입장권이 전부 털린 상태였고, 실내는 팬들로 가득 차 고개를 들이밀 틈도 없었다. 나는 차라리 경기라도 조용히 보려고 숙소 근처 스포츠센터를 찾았다. 영국에서는 TV 응원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 현지 언론들의 박지성에 대한 관심은 한국 언론 못지않다. 특집 또는 1면 기사로 다루며 “강한 에너지를 지녔다”는 찬사를 보낼 정도다.

영국 현지 언론들의 박지성에 대한 관심은 한국 언론 못지않다. 특집 또는 1면 기사로 다루며 “강한 에너지를 지녔다”는 찬사를 보낼 정도다.

그곳엔 결승 진출이 좌절된 첼시의 살로몽 칼루가 있었다. 첼시 경기장 내에 있는 스포츠센터라 이따금 첼시 선수들이 들르지만 그의 모습은 좀 의외였다. 칼루는 선발 출장 리스트에 박지성이 포함된 걸 보더니 내게 퍼거슨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박지성이 아스널과의 준결승전에서 활약한 점을 들어 선발 출장은 당연한 거라고 말했다. 칼루와 나란히 TV 스크린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실내에 평화가 흘렀다.

영국에서 박지성에 대한 기대는 생각보다 크다. 이곳 신문을 꾸준히 주시해온 나는 박지성이 붕붕 나는 것처럼 묘사한 한국 언론들의 보도가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됐다. …. 일간지와 스포츠지를 막론하고 내가 본 모든 매체에서 박지성의 선발 출전을 예측했다.

첼시의 칼루도 “박지성 출장은 당연”

그중 일부 매체는 박지성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싣고, 그가 챔피언스리그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라 점쳤다. 는 “박지성은 강한 에너지를 지녔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어울리는 선수”라며 “한국에서 그는 베컴보다 유명하다”고 평했다. 은 “박지성은 에브라와 함께 훈련 과정을 따로 배운 듯하다. 그는 조용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경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는 아예 한 면을 털어 박지성의 어린 시절부터 선수로서의 성장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박지성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차범근 전 감독과 비교되기도 했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그가 외교사절 못지않은 ‘애국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같이 박지성을 대서특필한 주요 매체들을 보며 이곳이 한국이 아닌 영국이라는 사실에 새삼 전율했다. 그만큼 영국에서 박지성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영국 매체들도 앞다퉈 박지성 보도

이렇듯 각종 언론 보도가 장황하게 풍악을 울렸지만, 정작 본편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분투했지만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기진맥진하다 바르셀로나에 두 골을 먹고 그대로 져버렸다. 박지성은 후반 21분, 베르바토프와 교체되며 경기장을 나왔다. 65분 동안 활약했지만 팀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치욕의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국인에겐 박지성이 그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러웠으리라.

나는 경기가 끝나고, 로마에서 이를 지켜본 마르셀 드자이(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뛰었으며 마르세유와 AC밀란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드자이는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지긴 했지만, 퍼거슨 감독의 선발진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박지성 또한 언제나처럼 제 몫을 다했다는 말로 한국 팬들을 위로했다. 드자이는 만일 자신이 여전히 현역 선수로 뛴다면 그토록 열심히 뛰는 선수를 수비하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최고의 수비라 극찬받던 드자이가 박지성과 같은 시기에 경기에서 맞닥뜨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농도 던졌다. 그는 박지성이 시즌을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고, 다음 시즌엔 분명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덕담했다.

경기 내내 나와 함께 있었던 살로몽 칼루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에투나 투레 같은 아프리카 친구들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듯싶었다. 첼시가 누구 때문에 탈락했는지 금세 잊었는지, 참으로 태평한 모습이다. 그 역시 이날 경기를 총평했다.

“오늘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오늘 경기력으로만 본다면 바르셀로나가 이긴 게 당연하다. 좋은 경기였다.”

칼루는 앞으로 박지성과 프리미어리그에서 선의의 경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2008·2009시즌 첼시의 홈구장에서 박지성의 선제골에 동점골로 응수한 적이 있다.

한양에서 장원급제한 큰오빠 보는 듯한 심정

2008·2009시즌 챔피언스리그는 막을 내렸다. 이번 시즌, 영국인들은 박지성이란 가치를 재발견했겠지만 한국인이라면 그에 대한 무한한 자랑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이탈리아 리그 세리에를 주로 취재하면서도 그가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행방을 주시했다. 지금은 한양에서 장원급제한 큰오빠를 보는 심정이랄까. 문득 그가 이곳 나이로 스물여덟이라는 게 안심이 된다. 그에겐 여전히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3중 허파’ 박지성, 그의 다음 목표가 궁금해진다.

글· 사진 서민지 축구여행가 thisisminji@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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