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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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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장화 아닌 축구화의 나라?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골수 마니아들의 삶…
매주 1500만명이 축구 로또 살 정도로 엄청난 규모
등록 2009-04-24 10:40 수정 2020-05-03 04:25

지난번에 이어 이탈리아의 축구 문화에 관한 이야기. 나는 최근 룸메이트인 아리아나의 고향 크레모나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왕년에 축구심판이었던 그의 아버지 아스카니오 로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이올린의 명산지로 알려진 크레모나는 밀라노에서 차로 1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아담한 마을이다. 조만간 이곳 출신의 축구 스타인 잔루카 비알리(유벤투스와 첼시에서 뛰었던 이탈리아의 스트라이커)와 마시모 마우로(유벤투스와 나폴리에서 뛰었고 현재는 비알리와 함께 축구해설가로 활동)가 함께 축구박물관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하니 머잖아 축구 애호가들의 관광 명소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05년 5월20일 유벤투스가 세리에A 우승컵을 품에 넣자 토리노의 피아자 카스텔로에서 유벤투스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사진 REUTERS

2005년 5월20일 유벤투스가 세리에A 우승컵을 품에 넣자 토리노의 피아자 카스텔로에서 유벤투스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사진 REUTERS

조각처럼 단정한 로사의 집에 들어서자, 그가 나를 딸처럼 반겼다. 먼저 눈에 띈 서재는 심판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사진들과 크레모나팀의 깃발 등으로 장식돼 있었다. 로사는 어릴 적엔 선수로 뛰었지만 18살 때부터 심판으로 전향했다고 말했다. 1968년부터 1992년까지 프로모치오네 리그에서 심판 생활을 했으니 과연 베테랑이라 불릴 만했다(세리에A, 세리에B, 세리에C, 세리에C1, 세리에C2, 세리에D 등으로 구분된 이탈리아 리그에서 프로모치오네는 일곱 번째 리그에 속한다). 1992년 은퇴한 뒤로는 심판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는 로사의 직업은 회계사. 그러니까 부업처럼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매주 월요일에 축구 규칙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15~35살 학생들을 보며 그는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을 회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4년 심판 생활 뒤 은퇴해서도 오로지 축구

로사의 하루는 조간신문에 실린 지역 축구팀의 경기 스코어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 결과가 궁금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축구 로또인 ‘스케디나’를 맞히는 것도 소박한 즐거움이라고 그는 말했다. 로사는 세리에A와 세리에B는 물론 잉글랜드·프랑스·독일 리그와 유럽대항전의 경기들을 일일이 챙겨보며 예상 점수를 맞히는 일에 어린애처럼 흥분한다. 나이를 지우면 여느 축구 팬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토토칼치오’(Toto Calcio)를 비롯한 3가지 축구 복권을 발행하는데, 이 중 칼치오 복권은 세리에의 주요 수익원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탈리아에서는 매주 1500만 명이 복권을 산다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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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역에는 토리노에 연고를 둔 유벤투스의 팬들이 많다. 로사 역시 유벤투스의 팬이었다. 유벤투스가 로마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 지역팀보다 많은 팬들을 갖고 있는 건 좀 의외다. 물론 지난 2006년 갈치오폴리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세리에B로 떨어져 명성이 휘청거린 적이 있지만, 유벤투스는 창단한 지 1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팀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우승을 40번이나 차지하기도 했다. AC밀란과 인테르밀란의 우승을 합친 것보다 많은 횟수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애정을 갖고 있는 로사는 지역팀인 크레모네제도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레모네제는 한때 세리에A의 자리를 지켰지만, 현재는 세리에C1에 머물러 있다. 또 다른 크레모나 지역팀인 피치게토네는 세리에C2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리그가 그렇게 많은데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겠지만, 실은 여기에도 규칙이 있다. 이탈리아는 한국과 달리 강등제가 있어 매년 3개의 팀에게 등락의 희비가 갈린다. 즉, 성적에 따라 우수한 팀에게는 상위 리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부진한 팀에게는 하위 리그로 전락하는 불운을 주는 것이다. 로사는 크레모나의 팀들이 세리에A로 승급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상파도 끝없이 축구 이야기만

한참 동안 왕성한 축구 지식을 자랑하던 로사는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경기를 보러 간다며 자리를 떴다. 세리에B에 있는 이웃마을 피아첸차와 브레시아의 시합이 열린다고 했다. 크레모네제와 피아첸차는 AC밀란과 인테르밀란처럼 지리적으로 가까워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다. 로사가 브레시아를 응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라이벌인 피아첸차가 크레모나보다 상위 리그에 있는 게 마뜩잖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는 이튿날에는 부세토에서 열리는 프로모치오네의 경기에서 자신의 제자가 심판을 본다는 이유로 모자를 챙겼다. TV로 봐도 될 텐데, 노구의 열정치곤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탈리아는 지역 TV가 발달돼 있어 지역팀 간의 경기도 중계를 한다. 지상파를 보더라도 내내 축구 스타들이 출연하거나 축구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축구라면 남 못잖은 열정을 가진 내가 봐도 약간은 지겨울 지경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룸메이트인 아리아나와 그의 아버지인 로사에 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남자친구의 전화임을 알리는 아리아나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어쩐지 익숙한 멜로디였다. 과연, 그녀는 벨소리가 인테르밀란의 팬들이 경기 직전 부르는 노래인 (Pazza inter·‘열광적인 인테르밀란’이란 뜻)라고 일러주었다. 장화같이 생긴 국토의 모양을 축구화를 신은 발이라 주장하는 사람들, 그 앞의 시칠리아를 공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축구 복권에 열광해 매일 신문과 TV를 끼고 사는 사람들, 로사와 아리아나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언제나 축구에 푹 빠져 사는 ‘이탈리아인’들이다.

서민지 축구여행가 thisisminji@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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