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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 김기춘 박근혜 파국을 불렀다

‘비선 실세’ 보도 뒤 특유의 공작정치…

결국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이어져
등록 2017-04-06 16:07 수정 2020-05-03 04:28



김영한  업무수첩  ‘다함께  잠금해제’


① 무조건 막아라! ‘청와대행 세월호’
② ‘정권 호위무사’ 보수단체
③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융성’
④ 청와대의 사법 장악 ABC
⑤ ‘박근혜 파국’ 부른 호위무사 김기춘 - 마지막 회


끝까지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그는 적어도 세 차례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을 막을 수 있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끝까지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그는 적어도 세 차례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을 막을 수 있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최순실’이란 이름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물론 청와대 내부자들조차 일제히 그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오랫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이들도 다 그랬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은 박근혜 청와대의 ‘비선 실세’를 입증하는 증거다. 김 전 수석은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에 책임을 지고 홍경식 전 민정수석이 물러난 자리에 발탁돼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을 국회에 나가 설명하라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에 ‘항명’하며 청와대를 나왔다. 그의 수첩엔 그 과정이 낱낱이 적혀 있다.

김영한 민정수석의 발탁은 비선 실세 ‘파워게임’의 결과물이었다. 2014년 3월22일 은 ‘박지만 “정윤회가 날 미행했다”’는 제목의 단독 기사를 보도했다. 2013년 12월 박지만씨가 정체불명의 사내로부터 한 달여간 미행을 당했는데, 이를 지시한 것이 민간인 정윤회라는 취지의 보도였다. ‘어둠의 비서실장’이라 불리던 정윤회의 영향력이 ‘문고리 3인방’(이재만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실장, 안봉근 제2부속실장)을 통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보도였다. 정윤회와 박지만 모두 해당 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후 수사 과정에서 박지만씨는 ‘미행 자체는 사실’이란 취지의 진술을 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박지만 미행설은 허위’라고 결론지었다.

비선 ‘파워게임’에 사정 라인 줄줄이 교체

박지만 미행설이 있던 무렵, 박관천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은 ‘청와대 비서실장(김기춘) 교체설 등 VIP 측근 동향’(2014년 1월16일)이란 제목의 감찰보고서를 작성해 조응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에게 보고했다. 2014년 11월28일 보도로 유명해진 그 문건이다.

문건에는 정윤회가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 핵심 비서관(이재만, 정호성, 안봉근)을 포함한 10명의 청와대 인사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식당 장소 등이 특정돼 구체적으로 적혔다. 이 10명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그들은 후한 말 조정을 농단했던 ‘십상시’에 견줘졌다. 정윤회를 ‘사수’로 둔 문고리 3인방이 민간인의 지시를 받아 ‘왕실장’이라 불린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를 계획했다는 건 충격적이었다.

박관천이 작성한 감찰보고서는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에게 전달돼 홍경식 당시 민정수석에게 보고됐다. 하지만 홍 전 수석은 “김 실장과 관련된 얘기이니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조응천이 김기춘에게 직접 보고했다. 후에 김기춘은 보고서를 받았지만 “신빙성이 낮아 자기 선에서 묵살했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은 오히려 그 뒤로 벌어졌다. 김기춘은 문건을 ‘전혀’ 묵살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건과 관련된 박관천 경정,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 홍경식 민정수석을 차례로 청와대에서 내보냈다. 2014년 2월부터 4월 사이의 일이다. ‘비선 실세’의 전횡을 조사하던 사정 라인이 후속 조사를 맡는 것이 아닌 차례로 경질된 이 과정은 박근혜 몰락을 부른 시작점이었다.

‘만만회’ 파문과 김기춘의 대응

문건 파문 직후인 2014년 6월 기용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자신의 전임자와 민정수석실 직원들이 무슨 사건 때문에 경질됐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 전 수석은 ‘항명’하기 전까지 비선 문제에 대해선 김기춘의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파문 등으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청와대 비선 파문은 박지원 의원을 통해 재등장한다. 2014년 6월25일 SBS 라디오 에 출연한 박 의원은 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 인사 참사와 관련해 “인사 추천은 청와대 비선 라인인 ‘만만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며 “외부 인사 개입 등 비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만만회는 박근혜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재만, 그리고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를 일컫는다.

‘만만회’ 파문에 대해 김 전 수석은 수첩에 ‘만만회 발언 실망스러워, 언론도 마찬가지’ ‘박지만 회장 출입, 정윤회 당 시절’(그림1)이라고 적었다. ‘長’이란 표기 아래 적힌 걸 보면 김기춘의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 야당 유력 정치인이 국무총리 인사에 청와대 비선 실세가 개입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사실관계 파악이나 후속 조사 등에 대한 메모는 없다. 오히려 관변 시민단체를 통해 박지원 의원을 고발하라는 김기춘의 지시에 따른다. 7월5일치 메모(그림2)를 보면 ‘長’이란 글자 아래 ‘박지원 항소심 - 공소 유지 대책 수립, 박사모 등 시민단체 통해 告發(고발) 검토’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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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의원 고발은 7월17일치 업무수첩에서 확인된다. 고발 검토 지시에서 실제 고발까지 열흘 남짓 걸린 셈이다. 이 기간에 주목할 것이 적혀 있다. 7월10일 ‘박지만 정신상태 돌파 방향?’(그림3)이란 메모가 있고, 고발 하루 전인 16일에는 ‘기무사령관 1. 박지만 회장(會長) 7.26부터 1주 휴가 -27 이광형 부회장 -37기 원영주 사장(수석)’(그림4)이 적혀 있다.

민정수석이 박지만의 ‘정신상태 돌파 방향’을 물음표까지 찍어 고민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기무사령관’ 아래 박지만 회장의 휴가 일정과 EG그룹 임원 이름을 육사 기수와 함께 적어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박지원을 고발한들 박지만의 정신 상태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미였을까. 세간의 의혹대로 박지만이 자신의 육사 동기생(37기)들의 ‘출세’를 민정수석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박근혜 7시간’ 비꼰 에 ‘천황 모욕’ 언급

만만회 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은 이후 비선 실세 파문이 벌어질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일종의 ‘매뉴얼’로 작동했다. 7월15일치 메모(그림5)를 보면 ‘령’이란 글자 아래 ‘만만회, 비선조직→기정사실화(化) 특감반 진원지 파악’이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이 직접 만만회 사건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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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그 방향은 비선조직의 실체 파악이 아닌 이를 기정사실화한 진원지를 ‘응징 체감, 반성하도록 해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박근혜는 ‘내부 정보 유출되지 않도록, 상시 감찰 체계 구축’을 지시한다. 이런 틀은 몇 개월 뒤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에서 그대로 활용된다. 문제의 본질을 ‘정보 유출’로 전환해 흐리고, 이에 대한 내부 단속 체계를 작동해 함구시키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언론 통제다. 15일치 업무수첩을 보면 ‘3. 시사저널, 일요신문 → 끝까지 밝혀내야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가 적혀 있다. 청와대가 직접 언로 차단에 나서며 ‘본때’ 같은 원색적 단어로 독려했음이 드러난다.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 정무·홍보수석실 조직적·유기적으로 대응’이라고 쓰인 대목에선 청와대가 언로 차단에 얼마나 ‘전사적 자세’로 나섰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김영한 업무수첩에는 언론 대응 관련 메모가 때마다 적혀 있다. 8월24일에는 ‘정윤회 전 실장. 관련 보도 - 국민’, 26일에는 ‘조선일보 보도 - 김영오 관련’ 등 청와대 내부 문제와 관련한 보도가 계속 거론된다.

이 무렵 ‘타깃’이 된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을 쓴 일본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였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부재했던 박근혜의 행적을 정윤회에 대한 세간의 소문과 함께 언급한 칼럼을 겨냥한 청와대의 압박은 집요했다. 8월8일, 9일, 10일, 27일, 29일, 9월2일, 29일, 10월3일, 5일, 6일, 9일에 연달아 관련 대응이 적혀 있다.

10월5일치 메모를 보면 ‘법무부 장관-산케이 지국장-정상참작 사유 무, 내외의 언론 주시. 사대주의적 법집행은 불가’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청와대가 법무부에 가토 지국장의 신병 처리 기준을 아예 하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업무수첩을 보면 청와대는 의 보도를 ‘천황 모욕 경우, 원칙대로’에 비유하는데 이를 김 전 수석은 ‘영장 기각 안 되도록 불법에 대한 대응임을 당당히 밝혀야’ 한다고 적었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을 천황 모욕에 견준 것은 청와대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한다.

‘산케이 처리 후 후속 대비’ 관련 메모를 보면 이 정부에서 외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이슈화 예상. 위안부 문제 고지 선점’이란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해석에 따라 일본 위안부 문제에서 일부 손해를 보더라도 가토 지국장의 신병 처리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6월11일 기용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6월25일 ‘만만회’ 논란 정리로 일을 시작해 10월까지 ‘산케이’ 파문 정리를 맡았다. 비선 문제에 침묵하고 충실히 대통령 심기 경호를 하는 것이 민정의 역할임을 각인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이후 김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공직기강 관리나 공정한 인사 추천 같은 내용이 아닌 ‘내부 단속’과 ‘언론 겁박’의 내용이 주요하게 적힌다.

‘정윤회 문건 유출’에는 언론 겁박으로 맞서

‘정윤회 문건 유출’ 보도가 있기 한 달 전인 10월29일치 메모(그림6)에는 ‘음종환 不作用(부작용) 1) 담당직원에 대한 음해 2) 녹음. 야당. 언론 - 노출 3) 분류 기준’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음종환은 청와대 홍보수석실 선임행정관(2급)으로 십상시 가운데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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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단속과 관련 있어 보이는 김 전 수석의 메모는 이후 며칠간 이어진다. 10월30일에는 ‘BH 내부 각 부처 국정과제 수행에 비열성적 인물. 외교. 안보 관련 기밀 유출 인물 → 불관용의 원칙. 최근 일련의 언론 보도 누출 상황 확인 → 박근혜 정부에 내심 적대적인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11월1일에는 더 구체적으로 ‘보안 강조 - 선임행정관, 기자에 누설’이 쓰여 있다.

이 대목들은 11월28일 가 보도한 ‘정윤회 국정 개입은 사실’ 단독 보도와 관련된 것으로 유추된다.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문건을 입수한 가 취재에 돌입하자 이것의 대응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앞서 그랬던 것처럼 정보 유출 진원지를 확인하는 내부 단속 과정에서 음종환 전 행정관의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은 훗날 벌어진 일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음 전 행정관은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의 배후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를 지목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이 음 전 행정관에게 직접 들었다며 폭로한 내부고발이었다. 비박계 지도부가 들어서며 가뜩이나 삐걱거리던 당·청 관계는 이 사건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보수 분당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다. 이 파문의 책임을 지고 음 전 행정관은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김영한 업무수첩을 보면 새로운 의구심이 든다. 당시 민정수석실이 문건 유출과 관련해 음 전 행정관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유출한 것일까. 지금까지 음 전 행정관은 ‘정윤회 문건 유출’과 관련해 일절 말을 않고 있다.

이어지는 메모의 흐름 역시 그렇다. 11월11일치 메모를 보면 ‘사람 인선 잘하도록 - 정예화’ ‘문서 유출 방치 건(ㅇㅇ문서)’라고 적혀 있다. 14일에는 ‘이재만 고발 ①교체 ②전례’가 쓰여 있다. 이는 보도되기도 전에 이재만 등을 통해 고발을 먼저 논의했음을 보여준다.

11월24일에는 ‘회의록’이라고 할 정도의 긴 메모(그림7)가 있다. 우선 ‘1) 행정관 인사 시기, 정함이 없음-필요에 따라 수시 인사’가 적혀 있는데, 이는 수석비서관 회의 차원에서 행정관 교체를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2) 정 전 실장 총괄 - 동인은 고직 감찰반 소속으로 해당 위치에 있지 않았음. 3) 문건 제시 - 정체불명의 文件(문건)임 4) 더 이상의 사실은 확인해드릴 수 없음’이 번호를 달아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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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十常侍(십상시) 장계상, 이창근, 정성철, 이춘호, 안봉근, 정호성, 이재만, 음종환, 신동철, 김춘식, 김덕준(부탁 7억)’이 쓰여 있다. 보도가 있기 나흘 전에 작성된 이 메모를 보면 청와대는 이미 보도 내용을 대략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보도가 나오기 앞서 정윤회 연관설을 부인하고, 문건을 정체불명으로 몰아가는 논의가 이뤄졌다.

대응이 주 업무가 된 민정수석

이후에도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주요 업무가 보도 관련 대응이라고 할 만큼 업무 지시와 메모가 계속 이어진다. 보도 사흘 전인 25일 ‘세계일보 보도 관련-타사 보도 관련 조치 필요. 일단 정정보도 청구 검토’(그림8) 방침이 정해졌다. 26일에는 ‘세계일보 세무조사 중(?)’이 언급되고, ‘세계일보 보도 관련 박관천에 대한 조치 방향’도 선제적으로 논의됐다. 문건 내용의 진위 판별이 아닌 유출 문제를 부각해 상황을 타개하는 전략이 보도 이전에 수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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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가 나온 11월28일에는 업무수첩 전체에서도 드문 ‘후속 회의’까지 열리며 이 문제를 논의한다. 28일치 메모(그림9)를 보면 ‘ㅇ문건 - 유사한 것 분류 중 - 풍문 구두 보고 유사한 문건이 무엇인지 - 복구 ×→ 문제의 문건은 찾고 있는 중, ㅇ박관천 등 문서 유출 관련자, ㅇ해당 식당 확인을 촉구’가 적혀 있다. 당시 청와대는 이 문건을 ‘찌라시를 정리한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 내용이 그대로 적힌 셈이다. 아울러 ‘ 공격 방안’을 찾는다. 대응이 아니라 ‘공격’이란 표현이 사용된 점이 예사롭지 않다.

28일에는 ‘후속 회의’까지 열린다. ‘악화일로 양상-종편’이 쓰인 것으로 보아 당일 낮에 종편 보도로 관련 내용이 확산되자 대책회의를 연 것으로 보인다. 메모는 ‘ㅇ해명 방책 별무, ㅇ엉터리 권력투쟁- 비서관, 행정관별 언론 접촉-최선, 백방 Cool Down 노력, ㅇ권한과 책임을 다하고 있음 / 꿋꿋이 버티는 노력 ⇒ 홍보수석 조력 ㅇ수사 상황으로 전환 : 국정조사 부당, ㅇ식당 CCTV 분석(JS 가든2), ㅇ보도의 양상 ⇒ 별건 보도 가능성, ㅇ언론사 상층부 상대 해명 요’ 등을 방안으로 제시한다.

보도가 나간 11월2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업무수첩에는 매일 관련 대응과 방향 등이 적혀 있다. 29일(그림10)에는 ‘검찰 수사 촉진-수사로 진상 규명’이 적혀 있고 ‘고소 8인 언론 대응 방법-지도할 것’이 메모돼 있다. 이는 검찰 수사에 개입하고, 고소·고발을 주도해 언론 방향을 잡는 논의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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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에는 ‘옷로비 사건, 삼성 떡값 사건 혼합형으로 진행 예상’으로 사건의 방향을 예측하고 ‘박관천 언론 노출 시작-심리적 불안 ⇒ 3~6월 기자 통화 녹음’이 적혀 있다. ‘작성 보유 문서 유출 ⇒ 적폐, BH는 있어서는 안 될 일, 척결’이라고도 적었다. 그러곤 ‘무능한 청와대-유출’로 잡아야 한다는 대목에선 물타기를 통해 살을 내주고 뼈를 추스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진실 규명 요구 높자 ‘종북 카드’ 준비하기도
‘어둠의 비서실장’으로 불리던 정윤회의 영향력이 ‘문고리 3인방’을 통해 유지되고 있음은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 훨씬 이전인 2014년 초에 이미 보도됐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어둠의 비서실장’으로 불리던 정윤회의 영향력이 ‘문고리 3인방’을 통해 유지되고 있음은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 훨씬 이전인 2014년 초에 이미 보도됐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보도 나흘 뒤인 12월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기초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내부에서 그대로 외부로 유출시킨다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며 “(문건을 외부로 유출하게 된 것도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한다. 직접 ‘정윤회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을 밝힌다.

이 프레임에 따라 민정수석실은 검찰 지휘 방향을 정리한다. 대통령 주재 회의 다음날인 12월2일 업무수첩을 보면 ‘수사의 성격 : 형사 고소 사건 vs 정치 疑惑의혹 사건’이란 제목 아래 ‘ㅇ검찰 수사가 αεω, ㅇ검찰 수사의 신뢰성 보존이 Key, ㅇ검찰의 수사상 필요와 요구에 대한 구체적 대응 조절, ㅇ수사 관련 의사결정 과정 - 保安(보안) - 수사 라인 外(외) 관여 경우 누설 위험, ㅇ언론 제기 의문사항 정리, ㅇ고소인 출석 범위 - 서면 제출 - 시기, ㅇ휴대폰, e-mail 통화 내력- 범위, 기간, ㅇ압수수색-박관천, 조응천, 정윤회 O外(O외): 박지만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등이 적혀 있다. 그대로 검찰에 전달하면 ‘수사 가이드라인’이 될 법한 내용이다. ‘자료 제출, 범위, 방식 → 영장은 의문’ ‘수사의 Tempo. 범위, 순서가 모든 것’ ‘검찰 분위기’ 등이 함께 적힌 것은 청와대가 세심하게 검찰 수사 방향을 짚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도가 있었던 11월28일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8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표, 편집국장, 취재기자들을 고소했다. 이 대응 자체가 김기춘을 위시로 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대응이었다. 검찰로 수사가 넘어간 뒤 상황은 청와대의 기획대로 ‘기강 해이, 문건 유출’로 맞춰진다.

그러나 12월13일 조사받던 최아무개 경위가 자살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정치권의 특별검사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국정조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난다. 업무수첩에도 이런 변화가 읽힌다. 최 경위가 자살을 인지하기 전인 13일치 메모에는 ‘장’ 글자 아래 ‘부정부패와는 무관. 안보(安保) 관련 비밀 유출 사례도 아님. 기강 해이이긴 하나 개인 일탈적 성격. 온 나라가 들끓을 사안이 아님. 황색지의 작태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임’이라고 적혀 있다. 바람대로 사태가 ‘Cool Down’ 되길 기다리자는 뉘앙스다.

그러나 14일 분위기는 급격히 바뀐다. 14일치 메모(그림11)에서 김기춘은 ‘특검, 국정조사 반대 논리 강하게 주장’ ‘여당 의원 일치된 입장-실체 없는 어구’ ‘특검 주장 단호히 차단, 철저히 대응 요’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에는 뜻밖의 한 문장이 적혀 있다. 15일치 메모에는 ‘종북 콘서트-언론 대응 전략’이 쓰여 있다. 17일에는 ‘신은미 논의 요’가 적혔다. 최 경위의 자살 이후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의 진실 규명 요구가 높아지자 언론을 활용해 ‘종북 콘서트’ 문제를 키웠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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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이 아니었다면 지금 박근혜는 어땠을까

12월26일, 김기춘은 김영한에게 ‘운영위 답변 준비’를 지시한다. ‘수석이 직접 답변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할 것’을 명령한다. 김 전 수석의 ‘항명’ 사퇴를 부른 결정적 지시였다. 운영위 출석 지시가 떨어진 뒤 12월31일(그림12) 김 전 수석은 ‘경(敬), 성(誠), 겸(謙), 묵(默)’이라고 적었다. 김 전 수석이 평소 한학에 조예가 깊었단 점을 감안하면 더 깊은 뜻이 있겠지만 문자 그대로 읽으면 ‘겸허하고 공손하게, 하늘의 뜻대로, 침묵하자’가 된다.

이후 1월9일 사퇴하기 전까지 김 전 수석은 1월2일 ‘세계일보 사장 교체 움직임. 현 사장 지지 세력 내분 양상’이란 메모를 적었고, 5일에는 ‘조응천 vs BH 대립, 정윤회+3인방→다른 것, 대포폰’ ‘박지만 공격 가능성→박관천에 지시 일련 문건-비밀성, 조치 신빙성 의혹. 박지만 몸통설 제기’라고 적었다. 그러곤 1월9일 11시에 예정된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하며 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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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치 메모(그림13)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편하다는 말이 있듯이 나가는 것이 있는 것보다 편해. 여당에 섭섭해’라고 썼다. 김 전 수석의 전체 메모에서 유일하게 개인적 감정을 드러낸 문장이다. 그 문장이 국회 출석을 종용한 김기춘 전 실장의 강압에 대한 김 전 수석의 피 끓는 심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 전 수석의 어머니는 김 전 수석이 운영위 출석을 강요한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해 “지도 살아남고 싶어서, 살아남으려고…”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전 실장이 요구한 것은 단순한 국회 출석이 아니라 실재하는 ‘비선 실세’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라는 허황된 지시였다. ‘공작정치의 원조’ ‘정국 운영의 달인’이라는 김기춘은 결정적으로 세 번 틀렸다. 박관천-조응천이 ‘정윤회’ 보고를 했을 때(2014년 1월), 박지만 미행설이 보도됐을 때(2014년 3월) 그리고 보도가 나왔을 때(2014년 11월) 김기춘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역사 앞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최순실은 2015년부터 국정 농단의 날개를 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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