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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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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멍해져 갔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어머니 인터뷰…

“한을 반푼이라도 풀어야”
등록 2017-01-28 05:54 수정 2020-05-03 04:28
고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어머니와 10여 차례 전화 통화와 2시간여에 걸친 대면 인터뷰를 재구성했다. 인터뷰는 지난 1월17일 오후 김 전 수석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여든여섯의 노모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게 김 전 수석의 죽음과 그 사회적 맥락에 대해 말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대목에선 격정적이었다. 인터뷰이의 발언을 최대한 살려 정리했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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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함 와보라카는데요.” 어느 날 아침 툭 뱉었다. 멀쩡하게 로펌을 잘 다니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왜 오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봐라, 들어오라카문.” 청와대가 변호사를 찾는다고 하니, 법률 상담할 일인가 싶었다. “직책을 받으러 가는 건 상상도 못”했다. 아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고 했다. “충성을 맹세하라데요.” 했느냐고 묻진 않았다. 며칠 뒤 아들은 청와대로 출근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6시면 기사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깨웠다. 밤 10시가 넘어 저녁을 못 먹었다며 “밥을 달라”고 하는 날도 잦아졌다. “밥 해먹이면 쓰러져 자고, 잠들면 일어나질 못”했다. 전화를 받곤 세수도 않은 채 양치만 하고 쫓기듯 출근했다.

“와? 김기춘이가 관두라 카드나”

아들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멍해져갔다. “아야, 니 얼굴이 왜 그렇게 계속 못돼지나? 힘드나, 검사하고 그거는 다르제?” 아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와요, 만날 하는 일인데요” 할 뿐이었다. 더 묻지 못했다.

“오늘 청와대에 사표 냈심더.” 그날도 역시 툭 던졌다. 아들이 청와대에 간 이후 뉴스를 자주 보기 시작한 노모는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을 얼추 알고 있었다. 두어 달 전부터 자주 고민을 토로하던 아들이었다. 혼잣말로 괴로워했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전달됐다. 한평생 보아온 아들, 누구보다 성정을 잘 알던 노모다. “흑백논리가 분명한 사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사람”이 정치판에 휩싸여 괜한 시름을 앓는다 싶었다. “아야, 잘했다. 이제 고마 좀 쉬어라.” 그래도 이번엔 한마디 더 물었다. “와? 김기춘이가 관두라 카드나.” 밖의 일을 도통 말하지 않던 아들은 그때 조금 속내를 비쳤다.

“자꾸 국회에 나가라고 하는데, 내 모르게 한 일을…. 것도 그렇고 민정수석이 국회가 부른다고 홀랑 나가버리면 앞으로도 니 나와라 너 나와라 할 때마다 계속 그래야 하는데…. 조직을 위해서도 안 되고 그런 선례를 만들 수도 없고….”

노모는 몇 마디 거들었다. “김기춘이 그놈이 지가 나가서 하지, 와 니보고 나가라쌓노. 정윤회고 3인방이고 그것들이 다 해먹은 거 아이가. 그거는 대통령도 다 아는 기 아이가. 그걸 꼭 민정이 나가서 해야 카나. 김기춘이가 나가면 안 되드나.”

아들은 그때 처음으로 김기춘에 대해 한마디 했다. “지도 살아남고 싶어서, 살아남으려고….” 딱 한마디였다. 하지만 “한평생 남에 대해 노닥거리지 않던” 아들의 말이었다. 김기춘이 지 살자고 아들한테 죽으라고 했다.

“니가 와 대구를 가노, 조윤선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 안 갔나. 니는 와 대구로 내려간단 말이고.” 어머니는 한사코 말렸다. 꼿꼿한 자존심 빼면 내세울 게 없는 아들이 ‘항명 파동’으로 꺾여 통음(痛飮)의 상처를 지닌 채 고향으로 가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와요, 고향으로 내려가면 좋은 거제.” 아들은 늘 그렇듯 차가웠다. “팔도강산 부임지를 떠돌던 아들”은 아무 짐도 챙기지 않고 훌쩍 떠났다. 그러곤 11개월 뒤 그 “거목 같던 아들”은 ‘수첩’으로만 남았다. 겨우, 59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수습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이유도, 기운을 내야 할 마음도 먹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자부심이었던 아들. 멍하니 방 앞에서 울고, 물건들을 닦으며 “이렇게 가버리는 놈이 어딨노, 이런 불효가 어딨단 말이고” 고함을 질렀다. 흐트러지지 않은 이부자리를 보고 여러 번 기함을 했지만, 아들이 대구시립묘지에 누워 있다는 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대구 갔던 아들, 서울 병원에

그렇게 아들을 떠나보내고 3~4개월쯤 지났을 때, 그리 억울하게 죽었다면 ‘유서’라도 한 장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고지식해서 집에선 컴퓨터도 안 쓰는 사람이었지만, 뭘 읽고 정리하는 걸 워낙 놓지 않던 사람이니 심경을 어디에라도 휘갈겨놓지 않았을까.

노모는 아들의 짐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읽은 책들부터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을 한 장도 빼놓지 않고 넘겨봤다. 며칠 새 엄지와 검지에 굳은살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든 책을 넘겨보고 옷장을 열었을 때, 노란 보자기에 싸인 서류 뭉치와 수첩들을 발견했다. 검사 시절부터 작성한 수사기록과 업무수첩이었다. 업무수첩은 1994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었다.

노모는 최근 것부터 찾았다. 청와대에 다닌 8개월 동안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총 23권의 수첩 가운데는 2014년 6월14일에 시작해 2015년 1월9일에 끝나는 업무수첩이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온전히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여러 번 등장하는 ‘長’이란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기자가 찾아왔다. “김기춘 실장과 갈등이 있었다면, 그 증거가 있어야 김기춘을 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기춘이 살자고 아들을 죽이려 했다면 그 증거가 혹시 수첩에는 있을까. “일하던 걸 이렇게 적어둔 게 있던데 도움이 되겠능교?” 노모는 기자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철옹성 같던 박근혜 청와대에 이격을 만들어낸 ‘김영한 비망록’이 세상에 등장한 순간이다.

아들의 수첩이 ‘비망록’이란 이름으로 여러 언론에 보도된 뒤 노모는 “김기춘과 우병우가 죽음을 재촉했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다. 세상 사람들은 ‘김기춘이 김영한을 청와대에 추천했다’고 수군거렸지만 노모는 안다. 언젠가 아들에게 “김기춘이 니를 추천한 기가?” 했을 때 “아이다”고 펄쩍 뛰었다. “아니라면 아닌 사람”이다.

“김기춘이 니를 추천한 기가?”

“살아 있는 게 후회스럽다”고 말하는 노모는 기자들에게 시달리며 체력적으로, 심정적으로 소진돼가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기력을 다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항명’했다는 아들의 명예 회복” 때문이다. 그러려면 “김기춘이 처벌”돼야 한다. 김기춘은 아들의 13년 선배다. 연수원 시절 아들에게 상장도 준 사람이지만 마지막엔 꼿꼿했던 아들을 “직무 배제”하며 괴롭힌 이다.

노모는 확신한다. “김기춘이 아니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사람(김영한)이 말을 했겠지.” 부당한 지시를 받고, 보고에서 제외되고, 밑에 있던 우병우가 치받는 상황에서 자존심이 대단했던 아들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노모는 지금도 자다가 벌떡 깨곤 한다.

“김기춘이는 직무를 거꾸로 하고, 우병우는 지 잘났다고 돌아다니니 그기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나.” 노모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뭐 도움이 되겠나 싶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그 사람의 한을 반푼이라도 풀고 내가 갈 게 아이가.”

세월호 참사 법률 공방이 시작될 무렵 ‘소방수’로 등장해, ‘정윤회 문건 파동’의 희생양이 된 이름,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여든여섯의 노모는 아직 아들의 방과 서재를 그대로 두고 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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