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조건 막아라! ‘청와대행 세월호’
② ‘정권 호위무사’ 보수단체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 아주 복잡한 정치 엔지니어링이 아니어도 된다. 무능과 사욕의 상징으로 전락한 박근혜 청와대도 실행한 일이다. 그들이 정권에 불리한 이슈를 덮는 주요한 방법은 ‘보수’ 시민단체의 ‘고발 이슈’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몇몇 보수단체 대표들이 ‘내가 역사다’라고 할 만한 기록이 여기 있다. 2014년 6월12일부터 2015년 1월10일까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낸 고 김영한 대구대 석좌교수의 업무수첩(비망록)이다. 그는 213일의 재임 기간 중 194일치 메모를 남겼다. 보수단체 관련 메모는 최소 30건 이상이다.
박근혜 청와대가 보수단체의 고발 사건에 집착한 인식의 뿌리를 짐작하게 하는 메모가 있다. 2014년 6월28일치 메모다. ‘보수의 약점은 집요함이 없는 것’ ‘법은 엄한 것보다 일관되어야’.(그림1) 메모 위 ‘長’이란 표기를 보면 김기춘 전 실장의 발언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업무수첩에는 청와대가 보수단체들의 집요한 법률 투쟁을 함께 기획했거나 활용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여느 투쟁들처럼 그것도 ‘반대투쟁’이다. ‘비선 의혹’ 등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모독’하는 움직임을 반대한다. 세월호 참사와 국가정보원 대선 여론 조작 및 정치 개입 사건(이하 국정원 사건)의 책임 부담을 정권에 지우는 움직임을 반대한다. 그리고 더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반대투쟁을 위해 변호사단체와 지원금을 틀어쥐려 한다.
① 대통령을 모독한 자, 응징하라김영한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청와대와 보수단체의 합작품은 ‘박 대통령 비선 의혹’ 고발건이다. 수첩 2014년 7월5일치엔 ‘박사모 등 시민단체 통해 고발 검토’라는 메모가 있다. 7월15일치엔 ‘만만회. 박지원 고발’이란 내용이 있다.(그림2)
앞뒤 맥락상 두 메모는 박지원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제기한 비선 라인 ‘만만회’ 의혹에 대한 대응건이다. 박 의원은 앞서 6월25일 라디오방송에서 “청와대 인사를 ‘만만회’라는 비선 라인에서 했다”고 주장했다. ‘만만회’는 박근혜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이재만 총무비서관, 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씨 이름에서 마지막 글자 셋을 조합한 말이다.
수첩에 ‘시민단체 통해 고발’이란 메모가 쓰인 지 16일 뒤(7월21일) ‘새마음포럼’이라는 보수단체는 박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새마음포럼은 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당시 후보자)을 지지한 단체다.
박 의원에 이어 ‘대통령 모독죄’의 덫에 걸린 인물은 일본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다. 그는 2014년 8월3일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7시간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비선’으로 지목된 정윤회씨와 같이 있었다는 루머를 전한 게 문제가 됐다.
수첩 8월5일치엔 ‘산께이 관련 보도 → 즉각적인 조치 할 것’이란 메모가 있다. 8월7일치엔 ‘산케이 잊으면 안 된다, - 응징해줘야. List 만들어 추적하여 처단토록’이란 내용이 있다.(그림3) 청와대가 ‘즉각 조치’ 의지를 밝힌 다음날(8월6일) 자유청년연합이란 보수단체는 가토 다쓰야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비선 의혹처럼 정권의 예민한 구석을 건드리지 않더라도 보수단체의 고발 대상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장하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을 ‘원수’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장 의원은 8월21일 페이스북에 “무책임한 대통령, 비겁한 대통령, 국민들을 구조하는 데 나서지 않는 대통령. 진상 규명에도 나서지 않는 대통령. 당신은 국가의 ‘원수’가 맞다”고 썼다. 그날은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38일째 단식농성을 이어가던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김영오씨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지만 청와대의 “대통령이 나설 일 아니다”는 논평만 들은 날이다.
8월25일 보수단체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은 장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다음날 수첩에는 ‘VIP 모독 장하나 의원 - 중앙지검 고발(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이란 메모가 적혔다.(그림4) 청와대도 보수단체와 같이 ‘모독’이라 여겼던 것이다.
청와대-보수단체 고발 작업은 예술가들에게도 손을 뻗었다. 홍성담 화백과 이하(본명 이병하) 작가가 타깃이 됐다. 홍 화백은 대형 걸개그림 을 2014년 9월 광주 비엔날레 행사에 출품할 예정이었다. 그림에 박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광주시는 대통령을 희화했다는 이유로 8월6일 전시 불허를 결정했다.
다음날(8월7일) 수첩엔 ‘우병우 팀, 허수아비 그림(광주), 애국단체 명예훼손 고발’이란 메모가 쓰였다.(그림5) 이튿날 보수단체인 보수국민연합은 홍 화백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청와대가 보수단체를 동원한 정황으로 읽힌다.
팝아티스트 이하 작가는 10월20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옥상에서 박 대통령을 그린 전단지를 뿌린 게 문제가 됐다. 그는 전단지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박 대통령 그림 아래 ‘MAD GOVERNMENT’(미친 정부)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수첩 10월31일치엔 ‘이병하, 엄마부대 고발(명예훼손)’이라고 쓰였다.(그림5) 인터넷 포털 네이버 뉴스 검색 결과, 보수단체 엄마부대봉사단이 이하 작가를 고발한 사실은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은 한 보수단체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긴 정황이다.
② ‘세월호·국정원’ 이슈를 물타기하라박근혜 청와대는 정권에 불리한 이슈를 덮는 데 보수단체의 활약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와 국정원 사건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국면에서 그랬다.
김영한 전 수석 업무수첩 2014년 7월13일치엔 ‘우파 지식인 결집, 우파 시민단체’라고 쓰였다. ‘세월호 특별법-국난 초래-법무부 당과 협조 강화’라는 항목 아래 적힌 메모다.(그림6) 그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진상조사위’를 보장한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다음날(7월14일)부터 국회 앞 단식농성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수첩 메모처럼 며칠 뒤 우파 시민단체가 나타났다. 7월17일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서울 광화문 세월호 참사 유가족 단식농성장 쪽으로 진입해 시위를 하려다 경찰에 제지됐다. 7월18일 엄마부대봉사단은 단식농성장 근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특별법보다 유병언 특별법이 우선’이란 취지의 주장을 폈다.
판사도 보수단체의 활동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이형주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8월27일 새만금 방조제 근처에서 불법 조업을 하다 전복 사고를 낸 한 선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 부장판사는 기각 결정문에서 “세월호 사고로 왜 수많은 우리 아이들이 희생돼야 했는지는 눈을 감고 세월호 사건 재판의 피고인들만 처벌함으로써 넘어가려는 국가의 태도가 이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쓴 것으로 알려졌다.
수첩 8월29일치엔 ‘군산 이형주 판사 - 재임용, 영장 고려 사유(도주, 증거인멸). 사회적 제재→보수·애국단체 SNS 항의. 사퇴 요구’라고 쓰였다.(그림7) 나흘 뒤(9월2일) 보수단체 미래를여는청년포럼(대표 신보라)과 청년지식인포럼 storyK(대표 이종철)는 대법원에 이 부장판사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냈다. 수첩 내용대로 보수단체가 움직인 것이다. 청년포럼 신보라 대표는 2016년 3월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20대 국회 현역 의원이 됐다.
야당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청와대와 보수단체는 ‘진상 규명’ 외의 다른 이슈를 지속적으로 파고들었다. 박범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7월29일 국회 브리핑에서, 전남 순천에서 발견된 주검이 경찰 발표와 달리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주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수첩 7월31일치엔 ‘박범계 의원. 고발 - 고발 성립 여하?’라고 쓰였다.(그림8) 그날 자유청년연합은 ‘7·30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여당 후보 낙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박 의원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수첩 9월18일치엔 ‘대리기사 폭행 - 검찰 고발’이라고 쓰였다.(그림9) 전날 김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대리기사와 폭행 시비에 휘말린 사건이 있었다. 수첩에 ‘검찰 고발’이라 쓰인 다음날(9월19일) 자유청년연합은 김현 의원과 유가족 5명을 폭행 혐의 등으로 서울남부지검에 고발했다. 자유청년연합은 9월25일 새마음포럼 등 다른 단체들과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은 세월호 유가족에게 술 처먹고 대리기사 집단 폭행하라고 국민성금을 낸 것이 아니”라며 국민성금 반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세월호 특별법’이 국내 최대 이슈로 떠오른 2014년 7~9월은 국정원 사건의 원세훈 전 원장 1심 재판 막바지였다. 청와대가 원세훈 전 원장 재판 관련 이슈에서도 보수단체들의 활약을 기대한 정황이 나타났다.
수첩 7월13일치엔 ‘권은희 내일 고발’이라고 쓰였다.(그림10) 다음날(7월14일) 자유청년연합은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모해위증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권 전 과장이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에서 허위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앞서 김 전 청장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6월5일 무죄를 선고하면서, 1심 재판부와 같이 권 전 과장의 법정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단체가 한 달 전 나온 판결문에 근거해 권 전 과장을 고발한 시점(7월14일)은 권 전 과장이 7·30 재·보궐 선거 야당 공천을 받은 지 닷새 뒤였다.
원세훈 전 원장은 9월11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국정원법 위반 혐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이 부정선거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정치적 판결을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청와대가 비판 여론을 반전시키려고 한 정황도 보인다.
판결 다음날인 9월12일, 수첩엔 ‘무죄. 검찰 책임 물어야. 판결문 증거 검토. 항소 여부 결정 야당 비난 △△성 - 지도. 당과 시민단체의 강한 압박 요구됨’이라고 쓰였다. 수첩 9월25일치에도 원세훈 전 원장 판결과 관련해 ‘우익단체에서는 행동 전무’라고 적혔다.(그림11) 청와대가 보수단체를 통해 ‘판결 비판 여론’을 ‘(애초의) 기소 비판 여론’으로 돌리려 한 정황이다.
청와대는 보수단체의 고발 이슈만으론 부족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청와대는 보수 법률가단체와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을 세력화하는 데 관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한 전 수석 업무수첩 7월7일치엔 ‘보수 법률단체 활용: 한변, 시변 커넥션 확보토록’이라고 쓰였다. 9월25일치엔 ‘보수 법률가단체 현황 - 민변, 통일 모색토록 → 정무’라는 메모가, 10월11일치엔 ‘대한변협회장 선거 - 건전 인사 선출. 단일화. 애국단체의 관여 요구됨’이란 메모가 있다.(그림12)
청와대가 보수 성향 변호사단체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과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시변)을 지목해 그들과 모종의 관계를 만들고, 진보 성향 변호사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의 통합을 꾀하려 한 정황으로 읽힌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청와대 눈높이를 기준으로’ 건전한 사상을 가진 회장을 선출할 수 있도록 단일화를 꾀하고, 그에 보수단체가 개입해야 한다는 인식도 읽을 수 있다. 변협 회장은 검찰총장 및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 법관인사위원회, 양형위원회 위원 선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권한이 있다. 당시 변협은 다음달 후보자 등록을 하고 이듬해 1월 회장 선거를 했다.
청와대는 보수단체의 안정적 운영에도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단체 성향별 보조금 차등 지급을 통해 보수단체의 편의를 봐준 정황이다. 수첩 10월31일치엔 ‘래 2∼3월, 국고보조금, 각 부처 장관 관심을 가지고 관찰 - 단체의 문제성 유무 검토’라고 쓰였다. 11월26일치엔 ‘홍보 보조금 지급시 단체 성향에 따라 광고도 그와 같이 국정철학 공유’ ‘적에 대하여는 적개심을 가져야’라는 메모가 있다.(그림13)
최근 청와대가 보수단체를 상대로 전폭적 재정 지원에 나선 정황도 드러났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수사한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의 공소장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2014년 3~4월 정무수석실 신동철 전 비서관에게 “좌파에 대한 지원은 많은데 우파에 대한 지원은 너무 없다. 중앙정부라도 나서서 지원해야 한다”며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좌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비해 우파는 배고프다. 잘해보자”고 말한 내용이 적시됐다.
는 지난 2월2일 특검팀이 신 전 비서관이 2014년 1월 어버이연합 등 15개 보수단체 명단과 그 옆에 지원 금액까지 적은 리스트를 행정관을 통해 전경련에 전달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가 당시 요구한 지원 금액은 단체당 2억원가량으로 총 30억원 규모라고 한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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