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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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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공안통에서 ‘껍데기 민정수석’으로

김기춘·우병우, 문고리 3인방에 치여 스러진 김영한
등록 2017-01-28 05:40 수정 2020-05-03 04:28
쓰는 자 위에 푸는 자
이렇게 취재했습니다_고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은 드문 기록이다. 피아를 선명히 가르고 ‘적’에겐 공작과 응징으로 대응한‘ 박근혜식 유신통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명의 기자는 지난 3주 동안 언론노조를 통해 입수한 업무수첩 복사본에 매달렸다. 우선 펜글씨로 적힌 내용을 일일이 한글문서 파일로 옮겨 정리했다. 그 내용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가와 언론학자, 법학자 등에게 자문했다.
그 과정에서 김 전 수석의 모친을 만나 보도 동의를 구했다. 김 전 수석과 함께 일했거나, 친분이 있었던 인사들과 접촉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도 되짚었다. 은 업무수첩의 주요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연재하는 한편, 원문 이미지 파일과 그 한글문서본을 독자에게 공개한다. 오독의 오류를 피하고 독자와 함께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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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수첩의 주인인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은 지난해 8월 지병인 간암으로 숨졌다. 2015년 1월 민정수석을 그만둔 지 1년7개월여 만이었다. 김 전 수석의 모친은 “아들이 청와대를 그만둔 뒤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다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가 청와대에 근무한 기간은 7개월가량이다. 김 전 수석의 지인들은 에 “호불호가 분명하고 강직한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은 2014년 6월12일 박근혜 청와대의 세 번째 민정수석에 임명되기 전까지 검찰의 대표적인 공안통이었다. 경북 의성 출신인 그는 1982년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8년 광주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12년 7월 대검 강력부 부장을 끝으로 검찰 생활을 마칠 때까지 주로 공안 분야를 담당했다. 대검 공안 3과장(2000년)과 1과장(2001년), 서울지검 공안 1부장(2003년) 등 공안 요직을 거쳤다.

그가 맡은 주요 사건들은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대검 공안 1과장 시절인 2001년엔 8·15 평양축전 방북단의 일원이던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회원 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바 있다. 참여정부 첫해에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을 이끈 배우 문성근, 명계남씨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이후 김 전 수석은 주로 지방 근무를 하다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야 검사장이 됐다. 수원지검장이던 2010년 그는 김상곤 당시 경기교육감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김 전 교육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 뒤 김 전 수석의 검찰 내 입지는 좁아졌다. 2011년 고검장 승진에서 누락됐다. 1년 뒤 그는 검찰을 떠났다.

이명박 정부에서 검사장 승진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2014년 6월12일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으로 발탁된다. 조윤선 정무수석, 안종범 경제수석 등이 그와 함께 새로 임명됐다. 주변에서는 김 전 수석의 청와대행에 의아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은 청와대 수석비서진 개편에 박 대통령의 친정 체제 강화라고 평했지만 김 전 수석은 이 범주에 해당하지 않았다.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김 전 수석은 정치에 관여한 분이 아니었다. 의외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청와대 비서관도 “박근혜 대통령 캠프 출신이 아닌데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른바 비선 라인에서 발탁했다면 김 전 수석처럼 깐깐한 사람이 아닌 좀더 말랑말랑한 사람을 기용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7일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나온 김기춘 전 실장은 ‘김 전 수석을 누가 추천했느냐’는 물음에 “대통령께서 한번 만나보라, 의사가 있는지 타진해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청와대가 법조계 원로 쪽에서 인사 추천을 받아 김 전 수석을 기용했다는 말도 나왔다.

김 전 수석의 청와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민정수석이었지만 우병우 민정비서관-김영한 민정수석-김기춘 실장으로 이어지는 공식 보고 체계에선 일찌감치 배제됐다. 사법부와 검찰 장악, 민간인 사찰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김 전 실장과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김 전 수석은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김 전 실장이 검찰 수뇌부 등에 직접 업무를 지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지인들은 “김기춘 전 실장의 부당한 지시에 김 전 수석이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지낸 유민봉 새누리당 의원은 통화에서 “민정수석의 업무 특성상 회의에서 길게 보고하거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자기 색깔이 강하고 소신이 뚜렷했다”고 말했다.

공식 보고 체계에서 배제돼

김기춘 전 실장은 김 전 수석을 건너뛰고 그 아래 우병우 민정수석 비서관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 ‘직거래’ 쪽으로 기울었다. 김 전 수석의 검찰 후배이자 그의 발탁 직전까지 대통령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강직한 스타일의 김 전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가 ‘문고리 3인방’(정호성, 이재만, 안봉근 비서관)의 전횡 등을 바로잡을 것이라 생각해 잘됐다 싶었다. 그러나 한두 달 뒤에 들리는 이야기는 ‘김 전 수석이 완전히 겉돌고 있다.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대통령이나 김기춘 전 실장, 문고리 3인방 등에게서 훨씬 더 신임을 받고, 김 전 수석은 이들이 살갑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김 전 수석이 힘만 빼고 역할을 못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과의 직접 보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조 의원은 “청와대에 들어갈 때 김 전 수석에게 반드시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지 않으면 청와대 구조상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전 수석은 사퇴 뒤 지인들에게 “7개월간 민정수석을 하면서 대통령에게 제대로 대면보고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보고는 문고리 3인방을 통한 간접 서면보고에 그쳤다.

2014년 말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사건은 김 전 수석이 사퇴를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해 11월28일 는 정윤회씨가 문고리 3인방 등과 함께 인사와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비선 실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사건의 초점을 청와대 문건 유출 문제로 틀었다. 꼬리로 몸통을 흔들어 본질을 흐리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은 김기춘·우병우 두 사람이 주도했다.

김 전 수석의 한 지인은 “정윤회 문건 사건처리에서 김 전 수석이 완전히 제쳐져 있다.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이 직접 대검, 중앙지검과 접촉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도 퇴임 뒤 주변에 “정윤회 문건 사건 조사에서 완전히 배제됐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정윤회 파동’으로 청와대 떠나

결국 김 전 수석은 정윤회 문건 파동 발생 한 달여 만인 2015년 1월9일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른바 청와대 항명 파동이었다. 당시 운영위는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이 핵심 의제였다. 김 전 수석의 출석은 여야가 합의하고, 김 전 실장이 지시한 상황이었다. 그는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민정수석이 정치 공세에 굴복한 나쁜 사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석하지 않겠다”며 “(정윤회 문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인들은 “민정수석임에도 정윤회 문건 처리 과정에서 배제된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성격상 위증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김 전 수석이 사의를 표명한 지 하루 만인 1월10일 토요일 오전 “강력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그의 사표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올렸고, 박 대통령은 이를 바로 수리했다. 후임 민정수석에는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임명됐다.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80쪽짜리 업무수첩만 남아 청와대의 속내를 증언하고 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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