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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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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머니의 눈빛, 그 고통…

등록 2003-08-22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 활동가들의 뜨거웠던 6개월… 폭격 맞은 사회 시스템을 어찌할 것인가 </font>

<table><tr><td bgcolor="F6f6f6"><font size="2"> ▶대담 참석자
-강인화(26·이화여대·대학원생)
-오수연(38·민족문학작가회의·소설가)
-유은하(27·한국아나벱티스트센터)
-최혁(35·전 사회당 대표)
</font>
</td></tr></table>

지난 7월29일로 공식활동을 접고 8월2일과 3일 차례로 귀국한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 소속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8월8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6층 회의실에서 뜨거웠던 지난 6개월 동안의 이라크 지원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아랍커피의 향처럼 진한 사람들

사회: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출국할 때와 돌아온 지금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 같다.

최혁(이하 최): 아직까지 멍한 상태다. 주변에선 “완전히 귀국한 거냐”고 많이 묻는데…. 또 가면 가는 거지, 뭐. (웃음) 사실 아쉬움이 많다. 세상 일이 자기가 상상한 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처음 갈 때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갔는데, 현실과 일치하는 게 거의 없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친절하고 정이 많을 줄 몰랐고, 그래서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을 줄도 몰랐다. 전쟁과 상관없이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를 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할 일이 참 많았다.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뭐가 남았는지. 2월22일 반전평화팀 3진으로 출국해, 5월 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갔다. 전쟁 전에도 반전평화팀 일원으로 두 차례 이라크를 방문했다.

유은하(이하 유): 반전평화팀 4진으로 3월 초 출국해 전쟁 전부터 바그다드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뒤 잠시 귀국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했다. 사람 만나서 에너지를 분출할 게 아니라, 쉬면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에 몰두했다. 2~3년 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앞으로 그 준비를 할 생각이다.

오수연(이하 오): 처음 출국한 게 3월15일이었고, 전쟁 동안에는 팔레스타인에 한달가량 머물기도 했다. 중간에 한 차례 돌아왔다가 다시 바그다드에서 3개월여를 지냈다. 소설가라는 직업 때문에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푹 빠져 지냈던 것 같다. 아랍커피의 향처럼 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아픈 역사를 간직하였다. 그런데 한 열흘 국내에서 쉰 뒤 다시 가보니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라는 느낌, 현실의 복잡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만 가지고 사는 건 아닌가.

강인화(이하 강): 처음 갈 때부터 많은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전평화팀 활동이 정리되는 상황에서, 전쟁 뒤 이라크 민중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목격하고 싶어 6월26일 출국했다. 막상 가서 보니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라크 국경을 넘어 요르단으로 다시 나오니 느낌이 새로웠다. 짧은 기간이라 정을 많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나중에 너무 아플까봐. 헤어진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전쟁 전과 달라진 게 뭐냐

사회: 현재 이라크 상황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전쟁이 가져온 변화는 뭔가.

유: 전쟁을 직접 목격하면서 너무나 비인격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바그다드 시내를 폭격한 사람이 자기가 누구를 죽이거나 다치게 한다는 생각을 했겠는가. 그저 건물을 무너뜨린다거나 군사시설을 파괴한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뭔가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10라운드 정도 계속해서 잽을 맞다가 한방에 KO된 것이라고나 할까. 후세인 정권 때도 고통을 받아왔고, 장기간 이어진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권력의 상징이 독재자에서 미 점령군으로 바뀌었을 뿐일 것이다. 언제쯤 그들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최: 사람들이 사담 후세인 욕을 많이 하는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지. 전쟁 전에도 두 차례 이라크 방문했었다. 처음 갔을 때는 전쟁보다 빈곤 문제가 더 눈에 들어왔다.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사회적 모순,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전쟁몰이를 하는 미국도 나쁘지만 후세인 정권도 나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라크 사람들은 문 앞의 큰 적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그런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후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미국을 찬양하는 건 물론 아니다. ‘미국은 할 일 다 했으면 어서 돌아가라’는 게 보통 이라크 사람들의 반응이다.

한쪽에서 자유를 말한다면, 다른 한쪽에선 무궁무진한 시장으로 떠오른 이라크의 모습도 있다. 이제는 후세인 정권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 대해 깊이 알진 못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온 삶의 방식이 외적 요인에 의해 바뀌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만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 게 더 큰 문제다. 우선 과거청산 문제가 앞으로 이라크 사회를 흔들어댈 것으로 본다. 이른바 ‘후세인 정권 부역자’에 대한 처단 문제가 당연히 나오지 않겠나.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불거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문화적으로는 특히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후세인 정권 아래서 23년간 금지됐던 각종 이슬람 전통의식이 벌써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font color="663300">오수연: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만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 게 더 큰 문제다. 우선 과거청산 문제가 앞으로 이라크 사회를 흔들어댈 것으로 본다. 이른바 ‘후세인 정권 부역자’에 대한 처단 문제가 당연히 나오지 않겠나.</font>

강: 이번 전쟁뿐 아니라, 이라크인들은 지속적인 전쟁 아래서 살아왔다는 점을 여러 차례 실감했다. 누구로부터 얻은 자유인가는 다른 문제지만, 후세인 정권에서 어떤 억압을 받았는지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출국할 때까지도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됐고, 전기공급도 불안정했다. 유엔 건물의 벽이 자꾸 높아지는 것도 이런 불안한 상황을 반영한 거라고 느꼈다. 거리의 탱크와 중무장한 군인,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 등 전쟁 전과 후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미군이 물러가고, 이라크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치안이 유지되기 시작하더라도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반전시위 소식에 눈시울 붉혀

사회: 우연찮게도 전쟁이 발발한 날 네 사람 모두 다른 곳에 있었다. 느낌도 서로 달랐을 텐데.

유: 방공호로 짐을 모두 옮겨놓고, 바그다드 시내 호텔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잠시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는데,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 때문에 깨어났다. 사람들이 모두 창가쪽으로 모여들었다. 첫 느낌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했다. 하늘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새겨졌고, 밑에서도 조명탄이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섭다는 것보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오: 전쟁이 일어난 날 새벽, 요르단 암만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다. 그날 요르단-이스라엘 국경을 넘는 게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특별히 오래 기다렸고, 짐 수색도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이스라엘쪽에서는 “이런 시기에 가스 마스크도 없이 여길 들어오는 게 좋은 생각이냐”고 묻더라. 비가 내리는 동예루살렘에 도착해 들어선 카페에서 바그다드가 무너지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왔다. 허름한 여관에서 그날 밤을 보냈는데, 사람들이 넋을 잃은 듯 텔레비전에 빨려들어가 있었다. 마치 정신의 고향이 무너진 듯 처연해보였다.

강: 그날 오전 11시에 학교에서 인터넷으로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전평화팀 생각도 나고, 반전운동 아무리 해도 날 전쟁은 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했다. 어떤 동료가 인터넷 게시판에 “어떻게 전쟁이 일어났는데 수업을 할 수 있느냐”고 적기도 했지만, 우중충한 날씨 속에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묘한 느낌이었다. 수업을 마친 뒤 광화문으로 가서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최: 공습이 시작됐을 때 요르단 암만 반전평화팀 숙소에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유은하씨 등 바그다드에 남은 3명의 팀원이었다. 두고 나올 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는데, 전쟁 터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 상태가 됐다. 절망감 같은 것이었을까? 전쟁 전에 여러 사람들이 목숨 걸고 인간방패를 자임하기도 했다. 지구의 절반이 반전 열기로 들끓었다. 그런데도 미사일 발사 단추는 시간이 되니 눌러졌다. 이성이나 양심적 노력이 한순간에 무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한동안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font color="663300">강인화: 우리가 출국할 때까지도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됐고, 전기공급도 불안정했다. 유엔 건물의 벽이 자꾸 높아지는 것도 이런 불안한 상황을 반영한 거라고 느꼈다. 거리의 탱크와 중무장한 군인,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 등 전쟁 전과 후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font>

사회: 전 세계적으로 반전 열기도 높았고, 국내에서도 파병반대 운동이 뜨거웠다. 현지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나.

유: 전쟁기간 동안 한국 소식을 많이 듣지는 못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특히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뒤에는 개인시간이 거의 없었다. 비상상태로 대기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번은 바그다드의 호텔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사람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더라. 가까이 가보니 한국에서 반전시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파병반대’라는 한국어가 들려오는데 왈칵 눈물이 치밀었다.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 우리가 아랍에 대해 잘 모르듯 그 사람들도 우리를 잘 모른다. 사실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하기 전 그곳 평화운동가를 소개받았었는데, 마치 첩보영화에 나오는 지령처럼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 자세히 전달됐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이 “네가 한국에서 온 첫 번째 인물”이라고 말하더라.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한국의 반전시위를 보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더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틈에 섞여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느낌이 감동으로 퍼졌다.

<font color="663300">유은하: 새벽에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이 모두 창가쪽으로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새겨졌고, 밑에서도 조명탄이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섭다는 것보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font>

최: 한반도는 중동 못지않게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분쟁지역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반전·평화 문제에 둔감했었다. 그런 현실에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반전평화팀에도 이른바 ‘운동권’만 참여한 게 아니다. 각계각층의 소박한 양심의 목소리가 모아진 게다.

폭격 다음날, 평화의 물을 섞으며

사회: 오랜 기간 머물면서 이라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강: 전쟁은 한순간이다.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기는 것은 잠깐이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바스라 아동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1차 걸프전 때 미군이 사용한 열화우라늄탄 때문에 백혈병에 걸렸다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잠시 방문을 해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돌아왔지만, 그 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숨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인큐베이터가 모자라 포대기에 싸인 채 떨고 있는 미숙아들의 모습도 생생하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font color="663300">최혁: 한반도는 중동 못지않게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분쟁지역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반전·평화 문제에 둔감했었다. 이런 현실에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반전평화팀에도 이른바 ‘운동권’만 참여한 게 아니다. </font>

유: 전쟁이 시작된 바로 다음날 아침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주 살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공습이 시작되면 외국인은 모두 사살하라는 후세인의 명령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캐나다 평화운동가가 세계 각국의 강물을 섞어서 ‘평화의 물’이란 걸 만들어왔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거리가 너무나 일상적이었다. 미국인도 몇명 있었는데, 어떤 위험도 느낄 수 없었다. 한가로운 거리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 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티그리스강에다 ‘평화의 물’을 섞으면서 한없는 평안함을 느꼈다.

최: 돌아오는 날 아침에 마주친 어느 이라크 여성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출발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어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주로 활동했던 뉴바그다드의 알 사시텔 지역을 한 바퀴 돌았다. 일하던 병원을 지나치려는데, 시커먼 아바야를 뒤집어쓴 여성이 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듯했는데, 한눈에도 아이가 많이 아파보였다. 그때 그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병원에 가봤자 약도 변변치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외국인인 내게 뭔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한 삶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었다.

쉽게 식어버린 언론의 보도 열기만큼이나 사회적 관심도 사그라지고 있다.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가 이라크를 방문하고 돌아갔지만, 정작 이라크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어본 단체는 많지 않았다. 이미 뭘 도와주고 싶은지를 결정한 뒤 찾아온 탓이리라. 두 시간 넘게 이어진 대담이 끝날 무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번 경험을 일회성으로 끝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의 친구로서 또 다른 분쟁지역을 찾아갈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사회·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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