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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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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소유권을 분산하라”

등록 2001-05-23 00:00 수정 2020-05-03 04:21

<오너쉽 솔루션>의 저자인 제프 게이츠 박사가 말하는 한국경제의 위기 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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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생산과 운영에 참여하고 그 소득의 분배에도 고루 참여하는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게 하는 민주적 대안.’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담았다는 <대중경제론>의 표지에 나오는 책 설명문이다.

김 대통령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기업소유구조의 민주화에 기초한 대중경제론’을 부르짖는 미국의 한 구조조정 전문가가 있다. <오너쉽 솔루션>의 저자인 제프 게이츠 박사가 바로 그다.

국제사무직노조연합(유니) 한국협의회 초청으로 지난 5월13일 방한해 1주일 동안 정계, 학계, 노동계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며 그의 이론에 기초한 소유구조 해법을 제시했다.

게이츠 박사는 지난 80년부터 87년까지 미 상원 재무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종업원지주제(ESOP: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 확대시행과 기업연기금제도 개혁에 앞장서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세계 35개 개발도상국과 체제전환국에 구조조정 관련 컨설팅을 해왔고 지금은 ‘공유자본주의연구소’(Shared Capitalism Institute) 소장을 맡으면서 금융자본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폐해를 널리 알리고, 소유구조 민주화를 전도하고 있다.

문화방송 홍은주 해설위원(경제학 박사)이 게이츠 박사를 지난 5월16일 오후 그의 숙소인 서울 홀리데이인호텔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홍은주(이하 홍) 당신은 <오너쉽 솔류션>을 통해 현재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해악과 병폐를 낳고 있다며,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소유구조를 제안했다. 현실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점들을 야기하고 있다고 보는가?

제프 게이츠(이하 게이츠)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특히 공기업 민영화정책을 통해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한국은 압축성장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에 따른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소유가 국내의 일부 가진자들과 외국자본의 손에 집중되고 있다. 공기업도 경쟁원리에 따라 가장 높은 인수가격을 제시한 민간투자가들에게 넘어가 재무적 수익가치를 최상의 목표로 삼고 운영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금융시장과 기업이 재무적 수익가치 극대화만 추구하면 다른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 각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빈부격차의 심화, 공동체의식의 부재, 지역간 불균형, 환경파괴 등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경제주체들이 시장원리만 존중하고 자본주의의 기본조직인 기업이 수익가치 이외의 다른 사회적·환경적 가치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한국도 맹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편입되고 있어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위기탈출의 해법은 기업 소유구조의 대중화에서 찾아야 한다. 기업의 소유권이 소수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종업원들을 비롯해 협력업체, 지역주민, 소비자 등 기업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에게 폭넓게 분산시키는 것이다.

기업 소유구조 대중화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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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업원지주제를 설계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 종업원지주제의 작동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해달라. 또 현재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기업과 종업원 수는 얼마나 되나.

게이츠 미 연방법에 의해 종업원지주제가 촉진되고 있다. 이 제도는 종업원복지 수단이면서 동시에 기업금융의 한 방법으로도 활용된다.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하는 회사와 종업원, 어떤 경우에는 대출금융기관에까지 세제혜택을 준다. 회사와 종업원들은 주식매입자금에 대해 세금감면혜택을 받을 수 있고, 종업원들이 주식을 처분할 때까지 배당이익에 대해서도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현재 미국에서는 종업원들이 1% 지분을 가진 기업부터 100% 소유한 기업까지 다양하다. 대략 1만1500개 기업이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체 미국 종업원들의 10%가 약 6500억달러 규모의 자기회사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종업원지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인이 되면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종업원은 ‘무임승차’하게 되고, 의사결정 절차가 복잡해 경영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연구보고서도 나왔다. 또 종업원들의 여유재산을 회사주식에만 투자하게 되면 그만큼 재산손실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 아닌가?

게이츠 미국의 경험에 비춰보면,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인으로서 내부의 부조리와 도덕적 해이를 감시함으로써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하지 않는 기업보다 오히려 ‘무임승차’의 문제가 덜하다. 경영의 비효율성도 실제로는 종업원지분이 낮은 기업이 더 심각하다. 경영진과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 경영진을 감시해야 하는 이사들간의 유착 때문이다. 미국에서 1980년 최고경영자의 연간보수가 생산직 평균임금의 42배였는데 99년에는 무려 475배로 증가했다. 이는 경영진과 이사회가 유착돼 경영진들이 기업성과를 과도하게 빼먹었다는 증거이다.

위험관리 차원에서 분산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도 논리적 설득력이 약하다. 증시 격언에 ‘달걀을 한바구니에 모두 담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바구니는커녕 달걀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격언이다.

한국에는 엄밀한 종업원지주제가 없다

한국의 종업원지주제가 순기능을 하지 못하고 주가하락으로 종업원들에게 오히려 큰 아픔을 줬다. 종업원들의 자사주 매입에 대한 금융지원이 거의 없고, 종업원 개인자금으로 회사주식을 비싸게 산 다음 주가가 폭락해 낭패를 본 사례가 허다하다. 한국의 종업원지주제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려면 어떤 법적·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게이츠 엄밀하게 말해, 한국에는 종업원지주제가 없다. 단지 종업원들이 자기 돈으로 ‘회사주식에 투자하는 프로그램’만 있을 뿐이다. 종업원지주제의 원리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생산적 자산은 확대재생산이 가능하다’는 개념이 깔려 있다. 만약 종업원들이 차입을 해 주식을 산다면, 나중에 그 주식에서 발생하는 소득으로 차입금을 상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종업원지주제는 작동할 수 없다. 금융지원 없이 종업원 자기계산으로만 회사주식을 사고 있다면 그 제도는 ‘조롱거리’이다.

한국의 일부 재벌들은 종업원지분을 적대적 기업인수에 대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능력이 없고 또 경영에 실패한 경우에도 시장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는다. 또 당신이 제안하는 경영참여적 소유구조가 재벌의 또다른 문제점인 과도한 부채, 과잉설비의 해소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가.

게이츠 경영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종업원지주제 운영규칙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종업원들에게 자기지분에 대해서 독립적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철저한 규칙을 만들면 된다. 그래서 종업원들이 무능한 경영진을 방어하기보다는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 경영진을 바꾸면 된다.

한국 재벌들의 높은 부채비율도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해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다. 재벌의 계열사들을 종업원기업인수 방식으로 분사시켜 독립경영을 하면, 계열사간 복잡한 상호출자나 상호지급보증 고리가 단절되는 등 재벌개혁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

대우차 처리는 전체의 가치를 따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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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기간중 대우차 노조관계자들을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는가. 그들은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가 인수할 경우 국부유출과 대규모 정리해고를 우려하고 있다. 당신은 미 상원 재무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 크라이슬러사에 대한 구제금융에 적극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크라이슬러식 해법을 대우차에 적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게이츠 대우차 노동자들에게 1980년대 중반 미국 철강회사들의 구조조정 경험을 참고삼아 얘기해줬다. 당시 미국 철강회사들은 시장개방으로 모두 도산 위기에 놓였는데 임금을 양보하는 대가로 회사주식을 받아, 즉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해 위기를 벗어났다. 대량해고를 막고, 퇴직자들도 기업연금을 계속 받을 수 있게 했다.

대우차 처리와 관련해서는, 정책당국자들이 지금 대우차 종업원들의 고용문제뿐만 아니라 부품공급업체와 판매회사 등 전체 네트워크의 경제적 가치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본다. 크라이슬러의 경우, 당시 정부가 총 12억달러의 구제금융에 대한 지급보증을 섰고 이 보증액의 15%만큼 종업원들에게 회사주식을 제공하면서 자구노력을 유도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로 크라이슬러의 신주인수권을 얻었는데 처음에 6달러에 받은 주식을 나중에 72달러에 처분해 공적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대우차의 자세한 사정을 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식의 구조조정을 권유하고 싶다.

당신이 책에서도 지적한 대로 세계 금융시장의 변덕스러움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경제도 자본시장 개방을 확대한 뒤로 국제 투기자본(핫머니)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종업원지주제가 다국적기업들의 적대적 기업인수와 국제투기자본의 공세를 차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게이츠 자본이 왜 국경을 넘나드는가. 더 높은 수익을 찾아서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재무적 수익이 유일한 판단기준인 금융자본의 논리에 결탁하면 국가의 경제적 자립기반이 무너진다. 15년∼20년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해야할 국가기간산업을 길어야 3∼4년 뒤의 수익가치만을 내다보는 민간자본에 맡겨버리는 정부는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재벌이나 국제투기자본과 흥정하는 상업집단이나 다름없다.

한국경제의 소유권을 ‘금융 사이버공간’(인간의 얼굴과 양심을 상실한 세계금융시장을 의미)에 내던지기보다는 한국 국민들의 손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짜내야 한다. 종업원지주제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어쨌든 소유기반을 대중화, 토착화해야 한다. 금융적 효율성과 사회적 효용가치가 공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소유기반에 따라 다르다. ‘돈이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압도하면 모든 공동체적, 사회적, 환경적 가치들은 수익극대화라는 목표에 희생되고 만다.

한국은 현재 독점공기업들을 민영화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전기술(KOPEC)의 경우 종업원들이 민간독점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종업원기업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직접 방문해 민영화 방안을 들어본 것으로 아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나.

게이츠 발전설비 설계엔지니어링회사인 한전기술은 고학력 전문인력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힌 지적재산이 핵심자산인 기업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기업일수록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하는 비율이 높다. 기업가치가 종업원들의 몸과 머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전기술의 경우, 종업원들이 민간독점체제를 반대하고 있는 마당에 왜 굳이 외부투자가들이 인수에 나서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술집약적인 기업에서는 기술인력들의 사기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투자가치가 없다.

한전기술 종업원들의 인수배경에 대해 정부가 ‘부당한 독점이윤’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는데, 그렇다면 종업원 인수 뒤에 발생하는 독점이윤에 대해서는 정부가 주식지분을 회수하는 형태로 정리하면 된다.

정부는 적절한 규율로 기업·시장 포용

당신 논리에는 정부가 ‘선의의 사회설계사’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관료주의나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게 현실 아닌가.

게이츠 민주주의는 정부가 국민들의 선의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게 기본전제이다. 정부의 기능이 비대해지거나 정부 개입이 역기능을 초래하는 이유는, 대부분 민간영역의 배타성 때문이라고 본다. 민간 자유시장경제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과 시장이 좀더 많은 가치를 포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율을 만드는 것이다.

정리/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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