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 color="#a00000"> 한홍구-박노자 교수의 만남, 20세기 한국사의 쟁점과 세무조사를 이야기하다</font>
그는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썼다.
박노자 교수에게 ‘리퍼브릭 오브 코리아’는 더이상 ‘남의 나라’ 혹은 ‘부인의 나라’만이 아니다. 두달 전, 드디어 희망했던 ‘귀화’가 이뤄진 것이다.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친밀감과 한국학 학자로서의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국적의 이동’을 결심하게 했다.
‘러시아 여권’이 아닌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서 처음으로 찾은 서울. 박노자 교수는 이튿날 한홍구 교수를 만났다. <한겨레21>에 역사칼럼을 번갈아 연재중인 두 사람은 서로에 글에 대해 열광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20세기 한국사의 가장 핵심적인 쟁점들을 짚어나갔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정권들이 내세웠던 민족주의…. 마무리 메뉴로는 요즘 핫이슈인 언론사 세무사찰문제가 올랐다. 오슬로대학과 경희대의 학생교류 실무협의차 지난 7월18일 들어온 박노자 교수는, 오는 8월7일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갈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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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북한정권에 대해서 특별히 공부는 안 했지만 옛날부터 관심이 많았습니다. 태교(胎敎), 그러니까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그 이데올로기의 심성적인 배경이 굉장히 궁금했는데…. ‘민생단 사건’에 대한 교수님의 박사논문을 영문으로 읽고서야 “바로 이거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힘센 유격대 국가를 그렇게 해서 만들 수 있었구나 하고요.
한홍구 제 박사논문 주제라 ‘역사이야기’가 펑크나면 언제든지 써먹으려 아껴놨는데, 오늘 박노자 선생님 때문에 조금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박노자 비장의 카드가 되겠습니다. (웃음)
이북정권의 탄생과 ‘민생단 사건’
한홍구 논문제목이 ‘상처받은 민족주의’입니다. 이북정권이 내세운 강한 민족주의의 배후에는 정신적 외상이 아주 깊었다는 거죠. 이북사회의 성장과정을 볼 때 가장 독특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세습으로 대표되는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간의 특수한 관계입니다. 마오저둥이나 호치민, 레닌도 엄청난 카리스마와 인간적 매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지만 김일성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추적하는 과정에서 ‘민생단 사건’의 영향을 알게 된 겁니다.
박노자 독자들을 위해서 ‘민생단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한홍구 참 복잡한 이야기예요. 1930년대 조선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에 들어갑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선 아무래도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는 게 유리할 것 같아서였죠.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혁명을 포기한 건 아니었거든요. 근데 중국 공산당의 일부 당원들은 이걸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중국혁명을 위한 힘이 분산되는 걸로 생각한 거죠. 그래서 조선독립을 이야기하는 놈은 민족주의자고, 민족주의자는 일본놈 스파이라는 식으로 3년 동안 약 1천여명을 잡아죽입니다. 중국 공산당 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적 정서가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아들이 생겨납니다. 근데 김일성이 그 아이들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데서 결단을 내려 애들을 껴안았죠. 그때 유격대에 들어온 많은 소년대원들이 바로 주체형 공산주의자의 모델이 됩니다. 나중에는 만경대 혁명학원의 원장을 지내게 되고요.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기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끈들이 맺어진 거죠. 이러한 수령과 추종자들간의 특수한 관계를 통해 이북사회가 재편이 된 겁니다. 때문에 저는 항일무장투쟁을 이해해야만 이북정권을 알 수 있고, 그 항일무장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민생단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북정권에 가장 핵심적인 전사라고 할 수 있지요.
박노자 우리가 보통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은 기술적으로 아무래도 남침이었기 때문에 북한침략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김일성의 모험주의를 한번 김일성의 입장에서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한홍구 앞으로 ‘역사이야기’에 쓸 밑천을 다 뽑아가버리시는데요.(웃음) ‘예고편’ 차원에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일성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는 건 한국사회의 분위기에서 큰일날 이야기일 수 있죠. 지난번 최장집 교수 사건에서 보셨다시피….
한국전쟁을 김일성 입장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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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근데 우리가 북한과 화해를 하자면…
한홍구 전 지금 조선일보 같은 사람들에게 ‘북한과의 화해’를 이야기해봤자 씨도 안 먹혀 들어갈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독자들을 위해서 이건 꼭 넣어주세요.(웃음) 문제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빼내버리면 한국전쟁의 성격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이북사람들이 저렇게 행동했는가, 왜 저런 얘기를 하는가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쯤 그 사람들 입장에서도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만주의 유산 중에서 ‘간도특설대’라는 부대가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김일성 빨치산을 잡기 위해 만든 조선인 부대예요. “천황폐하에 충성을 바치는 황국 청년들이 모여서 조선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만들었다”는 선전효과를 일본이 노린 거지요. 이 간도특설대 출신이 누구냐면 백선엽 같은 사람입니다. 한국전쟁 때 3군연합참모총장을 하잖아요. 조선인민군총사령관은 김일성이었고…. 그러면 인민군들 입장에서 볼 때 “봐라, 그때 토벌대로 우리 잡으러 댕기던 놈들이 국방군 지휘관 하고 있다…. 그럼 한국전쟁이란 게 뭐냐. 쉽게 얘기해서 연장전이다. 1930년대 만주벌판에서 조국을 찾겠다던 애국적 빨치산과 일제 앞잡이들이 쫓고 쫓기면서 승패를 못 가린 것을 지금 와서 다시 하는 거다. 봐라. 백선엽, 김백일, 신현준 또는 몇사단장 누구가 다 거기 출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죠. 민족해방전쟁적 측면이 다라고 얘기하면 엄청난 왜곡이지만 북쪽사람들이 생각하는 걸 무조건 무시하면 그것도 또다른 왜곡이 되는 겁니다.
박노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럼 전쟁이 끝난 뒤의 50년대를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남쪽에서는 독일에서 파시즘을 공부한 안호상이 “뭇 백성들이 이승만 지도자를 국부로 모시고 하나의 가족을 이뤄야 한다”는 일민주의(一民主義)사상을 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소련파와 연안파가 숙청당하면서 주체사상 형성쪽으로 기울어갑니다. 말하자면 양쪽에서 극단적인 파시스트형의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 거지요. 근데 그 ‘민족주의’라는 키워드가 사실 한국 전통과 별로 합치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남쪽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가장 쉽게 먹혀들어간 게 역시 민족주의였지만 말입니다.
한홍구 그럴 수밖에 없겠죠. 1909년 나철(羅喆)이 대종교를 개창하고 10년대에 단군숭배를 얘기했을 때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20, 30년대 가서는 이 사람들이 단군 얘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계속 식민지화가 진척되고 일본이 정치·경제적으로 조선을 틀어쥐어가는 속에서 단군 할아버지만 갖고 얘기해봐야 장사가 안 되거든요. 근데 그렇게 버린 카드를 나중에 주워든 사람들이 더 엄청난 얘기로 만듭니다. 단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환웅이나 환인까지 끌어내 청동기 내지 신석기시대에 우리 민족이 아시아를 제패하며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만주 실지 회복을 외칩니다. 민족적 입장의 방향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일종의 보상심리로 단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대의 찬란한 영광만을 얘기하는 거죠.
북한 민족주의가 강요한 희생
박노자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몰아붙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단군과 고대사하고 아무 관계가 없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만하다고 여깁니다.
한홍구 저는 관계는 있을 수도 있다고 보지만 단군 할아버지라는 식의 관념은 한참 뒤에 생긴 거고….
박노자 고려시대에나 조선시대 초기에 가장 강했죠.
한홍구 그때 단군을 말한 거는 건국의 첫 번째 왕이라는 의미였는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간 거라 말이죠. 일제시대에도 안 그랬는데.
박노자 북한도 남한처럼 민족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북한의 민족주의는 훨씬 내실이 있다고 할까요.
한홍구 북쪽의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체험에서 나온 거죠. 94년 김일성이 죽고 나서, 전세계 학자들이 북한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면서 언제 망하느냐 내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3초에서 3년 사이’라는 말까지 있었지요. 그런데 북쪽이 그 엄청난 식량난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섰단 말입니다. 남쪽의 수구 보수세력 입장에서 볼 때는 못마땅하겠지만, 어떻게 해서 죽지 않고 그 난국을 이겨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노력이 없었던 게 큰 문제죠.
박노자 북한의 민족주의가 엄청난 호소력을 행사하면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우러러봐야 하는 많은 성과를 낸 건 사실입니다. 제가 갑혀갈는지 모르겠지만. (웃음) 평양 거리나 함흥, 김책의 공장을 보면 존경심이 생기죠. 미국 덕분에 완전히 폐허가 됐었는데 말입니다. 근데 이건 어떻습니까. 한국의 민족주의가 한국 백성에게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강요했는지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박정희시대에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이 100시간이었다는 것도…. 그렇다면 북한의 호소력 있는 민족주의는 북한 주민한테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강요했을까요. 제가 대충 북한사람을 러시아에서 만나 들은 바로는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천리마 운동 했을 때 3일 동안 잠 안 자고 노동하는 게 기본이었잖아요.
한홍구 천리마 운동 시기에 관해 들어보면 믿겨지지 않아요. 절반의 형제들의 엄청난 희생 위에서 지어진 나라가 바로 북한이죠.
박노자 근데 희생이란 게 이런 것도 있어요. 한국에도 국제결혼을 백안시하는 풍조가 있지만, 북한은 사실상 완전히 금지돼 있거든요. 제 선배들 중 북한 가서 통역하다가 북한 여자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몇 있었는데….
한홍구 결혼을 못 했어요?
박노자 그 여자들이 처벌 안 당한 게 다행이죠. 생각도 못했죠. 그런 것도 희생이 아닙니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미국언론의 보도지만 이런 얘기도 있어요. 북쪽 여성들이 중국에 팔려가는 식으로 넘어가서 애를 낳았다가 중국 공안한테 잡혀 북한으로 송환이 되면 애를 돌려주기도 하는데, 영아는 죽이는 경우가 많아요. 혼혈이라는 이유로. 순혈주의가 너무 심한 거죠.
한홍구 피의 순수성이라는 말이 사람 잡는 얘긴데….
김대중, 이성계 이후 첫 비주류정권
박노자 이북은 개인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민족주의죠. 남한은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대미종속을 전제로 하는 관제민족주의인데 이 민족주의들을 결과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 운명은 어떻게 될 것 같은지 한번 여쭤보고 싶군요.
한홍구 민족만을 강조해서 분단이 해소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민족문제를 떠나서는 분단의 해소를 생각할 수 없겠죠. 문제는 집단만 있고 개인은 사라져버린 민족주의가 아닌, 개개인의 삶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섬세한 눈과 마음을 가진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게 민족주의자들만의 과제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요.
박노자 이제는 시민사회형 민족주의, 즉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일종의 선진 시민사회형 민족주의가 남북한 통합의 밑받침이 됐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군요. 마지막으로 요즘 문제 하나만 짚고 끝낼까 싶은데. 신문 탈세 이야기가 워낙 시끄럽지 않습니까? 이 탈세 관념을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죠. 고려시대 같으면 불교가 국교라 사원들이 세금을 안 내지 않았습니까. 조선시대 같으면 양반 사대부들이 세금을 거의 안 냈고요.
한홍구 대원군이 쫓겨난 것도 양반들한테서 군포를 걷다가….
박노자 한국의 새로운 귀족들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자식들 군대 안 보내는 것, 세금을 죽어도 안 내는 것, 외국물건을 쓰려는 것. 조선시대로 치자면 명나라 청나라 물건이죠. 전통계승을 자랑스럽게 하는 셈인데…. (웃음) 지금 김대중 선생이 계승 못하게 하니까 다들 화들 내고…. 대원군처럼 되면 안 되는데. (웃음) 어떻게 보십니까.
한홍구 지난번 <한겨레21>에서도 메인 스트림(주류)논쟁을 다뤘지만, 주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보면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가 끼어들어 정권을 잡은 것’이에요. (웃음) 이성계가 죽은 이래 처음으로 600년 만에 비주류가 정권을 잡은 것이거든요.
박노자 서울대 나온 분 앞에서 이런 말씀드리기가 뭐하지만 “서울대도 안 나온 놈이…”. (웃음)
한홍구 서울대가 아니라 “대학도 안 나온 놈이…”죠.
박노자 김대중 선생께서 정상적 자본주의를 적어도 언론분야에서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잘될 것 같습니까.
한홍구 80년대 유행했던 코미디가 있는데 유행어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처음엔 “잘돼야 할 텐데”로 시작했다가 “잘되고 볼 일이야”로 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잘될 턱이 있나”로 끝맺지요. (웃음) 언론권력집단으로서는 스스로가 굉장히 피해자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요. 왜냐하면 룰을 바꾸는 거거든요. 룰을 바꾸는 방향 자체는 옳은 거예요. 근데 사주님들 입장에서 볼 때는 “여태까지 묵인돼 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걸 도둑놈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지요. 나 혼자 해먹었냐, 이겁니다. 국가보안법도 그렇죠. 아마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얼마나 위반할까요. 몇백번 위반하죠?
박노자 네?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웃음) 모범적 위반자로서….
한홍구 국가보안법 위에서 줄넘기를 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고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잡혀들어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이건 법이 자의적으로 집행된다는 거지요. 세금문제도 처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되게 억울한 거죠. 근데 저는 김대중 정권의 정치력이라는 부분이 참 아쉬워요. 가령 곧 김대중의 비자금을 파헤치자는 식의 얘기가 나올 텐데, 김대중도 스스로 그런 문제를 고백하고 넘어가는 과정들을 집권 초에 밟았어야죠. 언론 세무조사도 좀더 빨리 했으면 더 좋았겠죠.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김대중이 민주화운동세력과 너무 관계가 악화된 것 같아요. 최근 언론개혁 과정을 통해서 많이 우호적이 되긴 했지만….
박노자 아주 어려운 과정의 맨 시작단계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홍구 우리 사회의 마지막 특권집단에 칼을 들이대는 거라 해야겠죠.
[%%IMAGE3%%]이젠 제발 합리적 보수를 만나고 싶다
박노자 마지막은 아니죠. 학교도 있고 교회도 있고 군대도 있고…. 그건 손 못댈걸요.
한홍구 이제 문제는 한국사회 보수세력을 김대중이 어떻게 요리해나가는가 하는 겁니다. 이성계시대와 비교해본다면 그때는 민의 성장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화운동세력이 조선일보 패거리들보다 김대중을 미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우나 고우나 함께 성장해온 힘이 있는 거죠. 보수세력들도 600년 만에 처음 위기를 맞은 거고요.
박노자 위기를 만나야 나름대로 합리적인 쪽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홍구 이문열씨 같은 경우 “보수세력을 수구세력으로 매도하지 말라”고 악을 쓰지만 한국사회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게 합리적인 보수죠.
박노자 결국 탈세문제와 언론개혁이 크게 봐서는 정상적인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건설과정의 맨 시작에 불과한 거죠. 앞으로도 몇십년에 걸리는 아주 긴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홍구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개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길게 보죠. (웃음)
박노자 인류가 망하지 않고 여태까지 왔으니까요. (웃음)
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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