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민주적이거나, 사랑스럽거나

등록 2005-05-03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언론계의 여성 프리미엄 리더십, 권태선 <한겨레> 편집위원장과 서명숙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의 쿨한 데이트</font>

▣ 진행·정리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아주 다르다. 권태선 국장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깔린다면, 서명숙 국장의 목소리는 높이 튀었다. 권 국장은 별다른 동작 없이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으나, 서 국장의 양팔은 말할 때마다 춤을 췄다. 목소리와 태도에서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의 닮은 점이 있다면, 그동안 언론계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쿨한 리더’라는 점이다.

권 국장은 최근 들어 한겨레신문사 안팎에서 “힘드신가 봐요.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면 “엉덩이도 반쪽이 됐다. 지난해부터 시도해온 다이어트의 승리다”라고 바로잡아준다. 서 국장은 <오마이뉴스> 기자청문회에서 “몹시 쪼고 툭하면 열을 잘 받아 별명이 ‘뚜껑’이라는데 강성 기조를 유지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고는, “어? 때린 적도 있는데? 나이도 들고 인간성 회복 시간도 갖긴 했지만, 고친다는 보장은 없다”고 받아쳤다.

바람이 많았지만 봄 햇살이 겉옷을 벗게 하던 4월28일, 두 사람이 만났다. 5월15일 창간기념호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권 국장을 배려해 서 국장이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찾았다.

[%%IMAGE1%%]

엉덩이가 반쪽? 다이어트의 승리!

<font color="663300">사회:</font> 독자 서비스 차원에서 개인사를 말해달라.

<font color="008080">권태선(이하 권):</font> 안동 권씨 집안 맏딸이다. 보수적인 환경이었다. 제사 지낼 때 딸들은 못 들어오게 하는 식의. 덕분에 여성의식이 아주 일찍이 자랐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많이 개명됐다. 칠순이 훌쩍 넘은 분이 어머니 대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할 정도다. 누군가는 세뇌의 결과라고 말하던데, 꾸준한 설득이 비결이다.

<font color="6633cc">서명숙(이하 서): </font>우리 집은 정반대였다. 모계사회였다.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라 달랑 꺾꽂이하듯 우리 집에 왔고, 어머니가 실질적 가장이자 의사결정권자였다. 가게를 했는데 어머니는 경영을 하고, 아버지는 주로 바닥을 쓸었다. 단골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환대하고 나서는데, 아버지는 ‘여기 쓸어야 하니 비키라’고 말할 정도였다. 허드렛일만 하니 고객관리나 경영 마인드를 가질 기회가 없었던 거지. 지금 보니 아버지가 참 외로웠겠구나 싶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건강관리랄까, 특별히 하는 운동은?

<font color="008080">권:</font> 집이 여의도라 한강 고수부지를 매일 걷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40분쯤 걷고 자정 넘어 퇴근하지 않는 한 밤 11시에 또 걷고.

서: 난 가만히 있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몰아서 한다. 산에 가고 이리저리 뛰다가 또 몇달 쉬고. 작심삼일이지.

<font color="663300">사회:</font> 홍일점이거나 드문 여성으로 언론계에서 지내왔는데, 지금까지 버틴 동력은?

<font color="008080">권:</font>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여성이 많이 가지 않는 부서에서 일했다. 1978년 <한국일보> 입사하고 문화부 잠깐 있다가 사회부로 갔고, 1988년 <한겨레> 창간 때 들어와서는 국제부랑 사회부 법조담당 중 하나를 하겠다고 했다. 뭐가 되겠다 이런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그렇게 일을 배운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font color="6633cc">서:</font> 긴말 필요 없이 정글 싸움이었다.

<font color="008080">권:</font> <한겨레>에 입사했을 때 아이 둔 엄마였다. 초창기 때 여기자들은 야근에서 제외했다. 난 그냥 했다. 어떤 선배가 왜 애엄마를 야근시키느냐고 얘기했는데, 날 배려한 말이었지만 난 야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font color="6633cc">서:</font> 난 정치팀에 울면서 갔다. <시사저널> 창간 때 경력기자로 가서 노동자, 농민, 재야인사 관련 특집 기사를 몇번 썼더니, 막 재미 붙이려는데 위에서 정치부로 가라고 하더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당 기자실에 여자가 없었다. ‘저 여자 누구냐’는 말이 늘 뒤통수에 꽂혔다. 일간지 기자처럼 매일 출입하는 것도 아니라 더 그랬다. 지금은 여기자에게만 일부러 정보도 준다던데 그때는 ‘여자가 뭘 알겠어’ 이런 식이었다. 만나주기는 해도 건성건성 얘기한다. 시간이 지나 남자들하고 똑같이 쓰니까, 내 입으로 차마 남자기자보다 잘했다는 말은 못하겠고, 하여튼 괜찮게 쓰니까 나아지더라. 처음 1, 2년은 매일 가기 싫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제주도에서…

[%%IMAGE2%%]

두 사람은 기자로 뛰는 동안 ‘독보적인 행보’를 했다. 권 국장은 1997년 12월 외환위기 광풍이 몰아닥쳤을 때 <한겨레> 파리 특파원이었다. 그는 그해 12월 어느 날, 대부분의 언론사 특파원들이 마르세이유에서 열리는 스포츠 행사를 취재하러 몰려갔을 때 혼자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일찍이 노사정위 협력모델을 개발한 네덜란드 사례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노사 갈등 문제가 심상치 않아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노사정위’ 구상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의 심층보도는 DJ 정부의 노사정위 프로그램 개발에 자극이 됐다.

서 국장은 정치판에서 ‘맨몸 돌파’의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1991년 여름 YS가 민자당 내부 갈등으로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내려갔을 때, 경기 포천에서 5살 된 아들과 휴가를 즐기고 있던 그는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뒤를 쫓았다. 급한 김에 아들도 ‘끌고’ 갔다. 비양도행 배에 오르던 YS 일행은 산발한 모양새로 헉헉대며 애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에게 기가 질렸다. 그 덕분인지 그는 배에 동승할 수 있었고, <시사저널>은 YS의 ‘칩거 모습’을 단독 보도했다. 그의 아들은 손명순씨에게 용돈도 받았다.

<font color="008080">권:</font> 서 국장이 정당판을 잘 닦아줘서 지금 여자 후배들이 열심히 뛸 수 있는 거지.

<font color="6633cc">서:</font> <오마이뉴스>가 겪은 설움은 <한겨레>가 초창기 때 출입처에서 쫓겨나고 그랬던 것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대단히 모욕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시사저널>에서 처음 정당 출입할 때 사람들이 시사주간지라면 ‘썬데이서울’을 떠올렸다. 지금은 각 언론사에서 공들여 인사하고 투자하지만 그땐 시사주간지가 뿌리내리기 전이었다. 그 시절을 겪으며 굉장히 강해졌다. 상대방 묵살을 견디기, 얼굴 두꺼워지기는 이런 데 도움이 많이 됐다. <오마이뉴스>에 선뜻 간 것도 마이너 매체가, 새로운 매체가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변화라는 건 2∼3년 안에 순식간에 이뤄진다. 몇년 전까지 누가 인터넷 매체가 이렇게 클지, 포털이 유통과 공급을 장악할지 알았겠나.

<font color="663300">사회:</font> <인터넷 한겨레>가 일간지 사이트 1위였는데, 네티즌은 급격히 이동한다. 신문 독자들이 신문사 사이트는 건너뛰고 인터넷 매체로 갔다가 다시 포털로 옮겨가는 것만 봐도.

<font color="6633cc">서:</font> 다른 신문들이 올드 패션일 때 <한겨레>가 야심차게 시작하긴 했는데.

<font color="008080">권:</font>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온라인·오프라인 양날개를 기대해달라. 온라인 부국장도 일 열심히 하는 평기자를 뽑아올렸고.

<font color="6633cc">서:</font> 어유, 무섭다. 평기자를? 난 <오마이뉴스>에 굉장한 매력과 호기심, 우려, 심지어 질투 같은 걸 갖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4명에서 출발해 5년 만에 70명이 됐다. 시민들이 기자로 뛴다는 콘셉트의 성공사례인데, 선거·촛불시위·탄핵 같은 큰 이슈나 정치적 격변이라는 외부적 요소, 수천 게릴라들의 적극적인 참여, 내부의 열정적인 젊은이들 이런 세 요소가 맞아떨어진 거다. 굉장한 성장모델이다. 그러나 내실을 다질 시간이 없었다. 솔직히 기자들도 웃자랐고 매체도 계통 없이 큰 면이 있다. 역할모델 하나 없이 신천지를 개척하면서 달려왔으니까. 지금은 재조정의 시기다. 호흡을 고를 때다. 속보나 현장성은 어느 정도 검증됐으므로 심층기사와 기획기사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특히 아쉬운 건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다. 이 정권의 탄생에 일정하게 기여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더 이 권력의 부패나 문제도 가감 없이 들여다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과거 DJ 정권이 출범하면 <한겨레>가 훨씬 더 좋아지리라 예상했지만 그게 오히려 <한겨레>에 독이 된 면이 있듯이, 지금 상황은 <오마이뉴스>에도 독이 될 수 있다. 정권과의 긴장을 살려야 한다. 물론 조·중·동처럼 의도적으로 해코지하고 왜곡된 의제 설정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편견을 거부하는 카리스마들

[%%IMAGE3%%]

<font color="008080">권:</font> 내 생각은 분명하다. 권력과의 관계에서 일체의 편견을 안 갖는 것. 어떤 정부도 선악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지향에의 올바름은 있어야 하지만 엄정하게 봐야 한다. 어떤 정파, 어떤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단호해져야 한다. <한겨레>는 <한겨레>만의 길, 제대로 된 언론의 길을 간다. 정파적 판단은 하지 않는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안팎의 변화 흐름을 타고 매체를 이끌어가는 데 본인이 적임자라고 생각하는가?

<font color="008080">권:</font> 그렇다.

<font color="6633cc">서:</font> 와우, 카리스마!

<font color="008080">권:</font> 사회를 보는 눈, 현실정치를 보는 눈, 이런 데서 난 편견이 없다. 반대로 <한겨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 어떤 신문이라고 규정해왔던 것에서도 자유로울 자신이 있다. <한겨레>에 필요한 것, <한겨레>가 지향하는 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생각이다.

<font color="6633cc">서:</font>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다른 능력은 의심 안 하겠는데, 주간지를 한 분이 일간지도 아니고 인터넷 매체라는 ‘초간지’를 잘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하더라.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연호 대표는 월간지 했던 사람이다. 출신이 문제라면 월간보다는 주간지가 빠르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여성이라는 점이 편집국 책임자로서의 역할에 어떻게 작용할까.

<font color="008080">권:</font>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은 리더십 발휘 이전에 사회 생활에 마이너스가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프리미엄도 존재한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분명히 플러스다. 나는 경계 지점에 서서 살아왔다. 남성과 경쟁하고 일해오면서 사회 전체의 남녀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인데, 그런 점에서 지난 조건이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고 본다. 지금 <한겨레> 편집국장은 창간 때 빼고 역대 편집국장 가운데 가장 하중이 많이 걸려 있다. 한달 만에 창간호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인력은 가장 적다. 그래서 더 힘들 것 같지만, 오히려 덜 힘들다. 에너지들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창간기념호 아이디어를 내라고 했더니 80건 이상이 쏟아졌다. 파이팅하는 분위기다. 비교적 행복하게 국장 생활을 출발한 셈이다.

<font color="6633cc">서:</font> 책임자 자리에 있으면 일 자체의 스트레스보다는 늘 주위의 태도가 스트레스다. 발 걸거나 딴소리하거나 아직은 안 그래도 된다거나 하는 말들, 더 이상 개개면은 안 되겠다 이런 분위기인 걸로 들리는데, 반가운 말이다.

<font color="008080">권: </font>취임에 앞서 비판도 즐겁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잡아갈 수 있으니까. 감정이 실리거나 해코지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 대환영이다. 결국 소통의 문제다.

테스토스테론이 남성보다 많다고?

<font color="663300">사회:</font> 서 국장은 테스토스테론이 남성들보다 더 많다던데.

<font color="6633cc">서:</font> 글쎄, 섹시하다고만 하던데. 이것들이 뒤에선 딴소리하고 앞에선 ‘누나 멋져요’ 하나 보네. (웃음) 취임 결정되고 댓글이 좌르륵 붙던데 ‘극렬 페미가 오마이에 온다’ 이런 식이었다. 그런 말 들으면 오히려 쑥스럽다. 여성운동 해온 분들한테 너무 미안하다. 나는 언론계 밥 먹으면서 한번도 여성쪽에 영양가 있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다만, 여기자로서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거, 기자로서 인정받는 거 이게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친 게 있다면 그것 정도다. 나는 3김시대 때 정치현장을 뛰었다. 그들의 영향력이랄까 자장 안에서 취재하고 글 쓴 거니까. 그런 점에서 ‘명예남성’적으로 돼버린 구조가 분명히 있었다. 주변에는 귀엽게 여성성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까, 어떻게 하면 허걱하게 하는 질문을 던질까, 그런 생각만 했으니까. 대학 다닐 때에는 여성문제연구소 만들고 왜 학생운동권에서 여성은 리더가 못 돼나 그런 고민도 했는데, 딱 졸업한 뒤에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의 세계에서 서바이벌할 것이냐 그것밖에는 신경 못 썼다. 남자들이 주로 등장하고 소비하는 언론 시장에서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까놓고 말하면, 애 낳을 때만 내가 여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1년 쉬면서 내 본성을 많이 회복했다.

<font color="008080">권: </font>섹시한 모습?

<font color="6633cc">서:</font> 푸하하! 본연의 감각이랄까, 정서, 표현력 이런 거. 원래 눈물이 굉장히 많았는데 사회생활 하면서 씨가 말랐다. <시사저널> 초창기 때 화장실에서 한번쯤 운 것 같은데, 그 뒤로는 울면 안 돼, 울면 쪽팔려, 이러면서 눌렀다. 사실 난 삼류 연속극 보면서도 우는 사람이다. 물기를 말렸던 게 지난 20년간의 생활이었다. 지난 1년 동안은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었다. 그래서 더 예뻐졌다는 말도 들었다. 표정이 부드러워져서 그런 모양이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그럼에도 ‘극렬페미’라는 말을 들으면?

<font color="6633cc">서:</font> 아는 사람은 다 웃는다. 기자들이 여성지면을 강화할 거냐고 묻던데, 이렇게 말했다. 나의 개인적 관심이나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다. <오마이뉴스>가 열린 진보를 내건 매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동안의 스탠스를 보면 여성문제에 대해서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한마디로 무관심했다. 다른 사회문제에 견줘 약했다. 댓글들도 심하게 왜곡됐다. 남녀 충돌 지점이 생기면 사정없이 긁어내리는 식으로. 겨우 초청된 여성 논객들도 몇달 뒤에 나가게 되는 일이 벌어졌던 거다.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되 세계인이 돼야 한다. 한국 사회의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같은 소수자들과 같이 가고 자기 문제 아닌 것에도 신경쓰는 게 열린 진보의 태도다. 여성 문제도 당연히 그 중 하나다. 아직까지는.

성비 불균형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font color="663300">사회:</font> 편집국 내 남녀 성비 불균형은 어떻게 보나.

<font color="008080">권:</font> 솔직히 버겁다. 2000년 이정빈 외교부 장관이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을 두고 술자리에서 ‘가슴이 탱탱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편집회의 때 그 문제로 크게 부딪혔다. 성희롱에 해당되는 말이냐 아니냐가 쟁점이었다. 남자 부장들은 대부분 술자리에서 용인될 수준의 농담이라고 받아들이던데, 나는 그 정도로 얘기할 상황이 아니라고 봤다. 그때 내가 얘기했던 것은 ‘이 자리에 편집위원들 열 몇명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 있는 12분의 1로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 자리에 없는 50%를 대표하는 거다. 절반의 발언권을 달라’고 했다. 편집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아, 당시 국장에게 ‘내 의견이 관철되기 어렵다면 사내 토론을 붙여보겠다’고 알리고, 토론을 붙였다. 한 사람이라도 중요한 자리에 여성이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이번에 인사를 하는데 <한겨레>에도 여성 인력상의 심각한 ‘블랭크’가 있다. 간부로 발탁할 기자 중에 여자가 드물다. 뛰어난 후배들이 많았지만 중간에 튕겨져나갔다. 그 블랭크가 참 아쉬웠다.

<font color="6633cc">서:</font> 사회적 공기로서, 사회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진단하고 끌고 가기 위해서 성비 균형과 성 인지적 관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font color="008080">권:</font> 서 국장도 말했듯이 내 또래나 그 앞뒤로 많은 여기자들이 본성을 억압하고 살아야 했다. 아직도 그런 면이 적지 않다. 직업인으로서 장벽은 치워져가고 있지만 개인의 삶과 관련된 출산·육아 같은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상태다. 여자 후배들에게 내가 겪었던, 내 후배들이 중간에 튕겨져나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것을 겪지 않고 지낼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여자를 편애해서가 아니라 그게 우리 사회를 재대로 가도록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지면 관련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여성이라는 사실이 책임자로서 결정을 내릴 때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되는 면은 없나.

<font color="008080">권:</font> 충분히 얘기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국장은 민주적으로 하지만 독재도 할 수 있는 자리니까. (웃음) 지금은 신문의 관점이 특히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언론학에서 얘기하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기계적 형평성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사실을 보여주는 건 단순 팩트가 아니라 리얼리티여야 한다. 거짓 객관성으로 포장되는 것들은 벗어버릴 생각이다.

<font color="663300">사회:</font> 어떤 리더로 평가받고 싶은가.

<font color="008080">권:</font> 민주적이되 결단력 있는 리더로 기억되고 싶다.

<font color="6633cc">서:</font> 후배를 사랑하는 리더, 직업적으로 잘 키워주는 리더. 그러면 나도 사랑받겠지. 존경보다는 사랑이 훨씬 오래간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font class="f9black">

<font size="4" color="#216B9C">
사고를 쳐주세요, 무한히!</font>



[권태선 선배에게 바란다]
▣ 서수민/ 한겨레 사회부 기자

[%%IMAGE4%%]
올해 초 권태선 선배는 ‘사고’를 쳤다. 여중 시절 이래 내내 유지해왔던 단발 생머리에 처음으로 ‘힘’을 준 것이다. 거기에 염색까지 했다. 충격에 남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슬퍼했다는 후문이 있다.
사실 머리는 대성공이었다. 선배의 편집위원장 취임과 만사인 인사, 제2창간 준비…. 머리 빠질 일밖에 없었으니 미리 파마를 해두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권 선배는 그동안 선호해온 머리 모양만큼이나 파격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선배에게 붙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일간지 ‘여성’ 사회부장, 편집국장, 이런 수식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선배의 키워드는 ‘한결같음’과 ‘여성적 리더십’이다. 그것이 80년 신군부하 제작 거부 투쟁 이래 오늘까지 선배를 지탱해온 힘일 게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선배가 내심 불만이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선배는 비빌 언덕인 동시에 부담이다. 격동의 시기, 선배의 편집국장 취임을 개혁보다는 안전판 역할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들은 적당히 무시했으면 한다. <한겨레> 안팎의, 변화를 향한 갈망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이다.
나는 11년차 평기자를 논설위원으로 발탁하고, 부장급 기자들을 평기자로 배치한 권 선배의 ‘사고’를 계속 봤으면 한다. 화창한 일요일이라면 2시간씩 열리는 편집회의를 10분 만에 끝냈으면 한다. 결혼 20주년을 맞은 부장 집에는 장미꽃을 보내 ‘오해’도 샀으면 한다. 사회부 기자들과 술 마시러 가서는 테이블 위에서 춤도 한번 추었으면 한다.
선배에겐 ‘무한히 사고를 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사고는 선배가 치시라. 뒷감당은 후배들이 하겠다. 흐흐.

</font>

</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font class="f9black">

<font size="4" color="#216B9C">
interesting? me too!</font>


[서명숙 선배에게 바란다]
▣ 박형숙 /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

[%%IMAGE5%%]
<<오마이뉴스>에서 일해보는 게 어떠냐는 ‘뭍밑’ 제의가 들어왔을 때 선배의 일성이 “interesting”이었다고 하더군요. 정치권과 방송의 러브콜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던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명숙의 행운이 아니라 <오마이뉴스>의 행운인가요?
암튼 노조와의 ‘100분 토론’을 거쳐 재적 인원 3분의 2 참가에 3분의 2 찬성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여유 있게 통과한 것만 봐도 서명숙 체제의 시작은 일단 청신호.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안팎의 남자들로부터도 반응이 좋다는 점. 왜 그렇잖아요. 잘나가는 여자에 대한 평가는 보통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인데 삐딱하게 보는 남자가 없다는 건…. 이를 두고 모 여기자는 “여자 마초 아니냐”는 ‘혐의’를 두더군요.
노조 간담회 때 패널로 참석한 저는 “남기자들을 편애한다는 소문이 있던데”라는 질문으로 이를 짚고 넘어가려 했는데 마침 선배의 답변 과정에서 힌트가 나왔지요. “나는 여성 문제보다는 정치 노선의 문제가 더 관점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편협하게 해석하자면 여성운동 시작 세대들의 ‘강박’이 묻어나는 답변이었어요. 남자와 ‘다이 다이’로 붙겠다, ‘여성 쿼터제’ 이런 거 솔직히 존심 상한다, 오로지 나로 승부하리라. 아닌가요? 할 말 많으시죠? ^^
다시 서두로 돌리면, 선배의 “interesting”이라는 즉자적 반응은 아마도 <오마이뉴스>가 선배의 그런 승부욕과 도전의식을 자극한 때문이 아닐지. 젊은 매체에 도전장을 던진 선배의 정치적 동기가 저의 바람과 어떤 결합을 이뤄갈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제 바람요? 21세기 여성 언론인의 역할 모델에 목이 마르다는 것!

</font>

</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