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공산당 간부회 1922년 ‘4월 결정서’ 러시아어 타자본. 제2항에 김규식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국제공산당(이하 국제당) 간부회 한국위원회가 결정서를 채택했다. 1922년 4월22일이었다. 국제당 최상급 기구에서 이뤄진 결정이므로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구속력이 있었다. ‘4월 결정서’라고 약칭하는 이 문서는 6개항으로 이뤄졌다. 그중에서 제2항이 주목을 끈다. 한국 사람 이름이 넷이나 나열됐기 때문이다.
제2항. 박진순, 박애, 최고려, 김규식(Ким-Гю-Сек) 동무는 고려공산당이 통합될 때까지 당 사업에 직접 간여함을 금지한다.1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통합하되, 네 사람은 그 과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한시적 당무 정지 명령이라고나 할까. 일종의 징계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이 중 세 사람의 이름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다투던 상해당(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박진순(25)과 박애(26)는 연해주 한인 청년으로서 재러동포 2세 출신의 신진 사회주의자였다. 박진순은 국제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냈고, 박애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장 출신이었다. 둘 다 러시아 정규교육을 이수했고, 교양 있는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청년 인텔리였다. 최고려(29)는 러시아 한인 사회의 대표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민의회 임원 출신이었고, 이시당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또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인 고려혁명군을 지휘하는 집행부 세 명 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이 거명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사회주의운동 통합을 해칠 수 있는 양당의 강경파로 지목됐던 것이다.
그런데 김규식(41)은 왜 여기에 올랐을까?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임시정부 대표자로 유명한 그 사람이었다. 사회주의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불과 5개월 전에 소비에트 러시아에 입국했을 뿐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배제해야 할 인물로 지목됐을까?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의장단 1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본회의 진행을 주재하는 지위에 올랐다. 특히 1922년 1월24일 제5차 본회의는 그가 의장 자격으로 직접 주관한 회의였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민족 대표자 150여 명이 좌정한 넓은 홀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이날 주요 안건은 ‘중국 여성의 지위에 관한 보고’ ‘워싱턴 회의와 한국에 대한 그 관계’ ‘한국의 혁명운동’ 등 세 가지 보고를 청취하는 것이었다. 이 중 세 번째 주제의 보고는 의장 김규식이 직접 맡았다.2

극동민족대회 연단에 자리 잡은 의장단. 이 속에 김규식도 포함돼 있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단의 단장이었다. 본회의 개막에 앞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각 대표자는 소속 민족별로 대표단을 결성했는데, 한국대표단도 만들어졌다. 대표단을 결성하기 위해 한인 대표자 총회가 열렸던 것 같다. 거기서 두 사람의 소규모 집행부가 선출됐다. 단장에는 김규식, 서기에는 고려혁명군의 정치 교육 담당자인 채동순(30)이 뽑혔다. 이 집행부는 대외적으로 한국대표단을 대변했다. 한 사람은 영어를,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대회 개막일 1922년 1월21일에 한국대표단이 작성한 공문서가 남아 있다.3 그 전날인 1월20일 저녁에 한국대표단 총회에서 의결된 결정 사항을 극동민족대회 자격심사위원회 앞으로 통지하는 문서였다. 이 문서 상단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메모가 있다. 러시아어 필기체로 “к протоколу no.7 21/1-22”(1922년 1월21일자 제7회 회의록 참조)라고 적혀 있다. 이는 한국대표단 총회가 이 날짜를 기준으로 일곱 번째 열렸음을 시사한다. 대표단 총회가 꽤 빈번히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본회의가 개막되기 전까지 7회나 개최됐던 것을 보면 말이다.
1922년 2월2일 극동민족대회가 폐막했다. 13일간 계속된 본회의가 끝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제정러시아 시기의 우리츠키 궁전에서 폐회식이 거행됐다. 150여 명에 이르는 각 민족의 대표자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호의로 2월3~4일 이틀간에 걸쳐 산업시설과 정부 기관을 시찰했다. 그 뒤 2월5일 아침부터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에 잔류했다. 모스크바에서 외교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국제당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하는 대외 교섭을 지속하려 했다. 의문이 든다. 극동민족대회가 끝나고 한국대표단이 해체됐는데, 어떤 자격으로 외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김규식과 그의 동료들은 한국대표단의 지위와 권능을 계승하는 상설 조직체를 결성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대표단 전권위원부’(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Delegation)라는 기구를 설립한 것이다.
대표 4명이 임원으로 선임됐다. 김규식이 의장을 맡고, 이시당의 실질적 리더로 지목받는 한명세(37), 이시당의 상해지부 당원 최창식(30), 이시당의 한국 내지부 당원 김시현(39)이 위원이 됐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물들이 포함됐고, 한국 내지와 망명지 상해의 연계를 수립할 수 있는 최적의 인선이었다. 전권위원부는 자신의 위상을 거창하게 상정했다. “3·1운동 이후 한국 혁명운동에 참가해온 여러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결집체’라고 자임했다. 22개 혁명단체를 망라하고 그 구성원은 25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김규식은 전권위원부의 임무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한국 혁명세력을 대표해 국제당 및 러시아 정부와 교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혁명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아내는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에 장기 체류할 예정이었다. 성과가 있을 때까지 외교 활동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국제당 동방부와의 교섭은 순조로웠다. 동방부장 사파로프(31)가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두 흐름 가운데 이시당을 일관되게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와의 교섭은 그렇지 않았다. 난관에 부딪혔다. 1922년 2월 초 한국대표단 전권위원부 위원 4명의 방문을 받았을 때,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극동부장 두홉스키는 난색을 보였다. 다른 하나의 한국 혁명가 집단으로부터 정반대되는 의견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를 대표한 이동휘(49)가 강력히 어필했다. 한국대표단은 혁명운동계의 자그마한 일부분을 대표할 뿐이고 편파적으로 설립됐으므로 그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두홉스키는 혼란스러워했다. 두 계열의 한인 그룹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로 혁명적인지를 판명하는 것이 몹시 어렵습니다”라고 토로했다.4
도대체 왜 이동휘는 한국대표단 전권위원부를 돕지 않았을까? 그것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상해당과 이시당으로 나뉘어 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시당은 극동민족대회를 주관한 국제당 동방부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선정도 거의 전적으로 이시당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대표 56명 가운데 이시당을 지지하는 대표자는 49명이었고, 상해당을 지지하는 이는 7명에 불과했다.
한국대표단장 김규식은 이시당과 시종일관 보조를 같이했다. 보기를 들자. 극동민족대회 개막 즈음에 상해당의 젊은 이론가 박진순이 대회 자격심사위원회에서 심의권을 가진 대표로 인정받았을 때다. 한국대표단은 총회를 열어 박진순의 대회 참석을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자격을 취소해줄 것을 요구하는 통지서를 자격심사위원회 앞으로 보냈다. 이 문서에는 대표단장 김규식의 서명이 첨부돼 있었다.
상해당의 지도자 이동휘는 한국대표단 전권위원부가 한국 혁명운동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시당이 간판만 바꾼 것일 뿐이었다. 의장 김규식에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평가했다. 이동휘는 김규식이 ‘저명한 친미주의자’이자 프랑스 베르사유 파견 대표였음을 환기했다. 김규식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것은 러시아에 입국한 뒤이며 불과 서너 달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5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당시 38살).
결국 이동휘는 전권위원부의 활동을 봉쇄할 수 있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국제당 동방부는 이동휘에 대해 시종일관 비협조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동휘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연합중앙위원회는 국제당 간부회 결정에 따라 성립된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최상급 기구였다. 국제당 동방부 당료들이 이시당 우월론의 관점을 견지한 데 반해, 간부회 위원들은 상해당·이시당 등가론을 지니고 있었다. 두 당이 협력해 통일된 고려공산당을 결성하되, 이를 집행하기 위해 양당 동수의 6명으로 이뤄진 연합중앙위원회를 설립하라는 것이 간부회 결정의 골자였다.
한국대표단 전권위원부의 위상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투쟁이 벌어졌다. 전체 한국 혁명을 대표하는 최대 혁명기관인가, 아니면 진정한 민족혁명단체의 통합을 방해하는 미미한 분파적 그룹에 지나지 않는가. 김규식은 앞 견해를 상징했고, 이동휘는 뒤 견해를 대표했다.
1922년 ‘4월 결정서’는 이 분규에 대해 국제당 간부회가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결국 김규식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국제당의 대규모 물질적 지원을 받아서 3·1운동 이후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려던 김규식의 의도는 꺾이고 말았다.
김규식은 모스크바를 떠났다. 독립신문 한 귀퉁이에는 그의 상해 귀환 기사가 실렸다. “지난번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양민족혁명대회에 출석하기 위하여 그곳에 갔던 김규식씨는 다른 일행들보다 뒤떨어져 있다가, 이번에 이르쿠츠크를 거쳐서 지난 1922년 6월17일 밤에 무사히 상해에 돌아왔다”는 내용이다.6 한국대표단 전권위원으로 함께 선임됐던 최창식과 짝을 이뤄 돌아왔다고 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Постановл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ким делам( 국제당 간부회 한국문제위원회의 결정 ), 1922년 4월22일, с .1,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55, л .1.
2. 심지연 역, ‘제1회 극동근로자대회 회의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2023년, 73~108쪽.
3. Executive committee of the Korean delegation to the Congress of communist and revolutionary parties of the Far East, “To the Mandate Commission, First Congress of communist and revolutionary parties of the Far East.”, 1922년 1월21일, РГАСПИ ф .495 оп .154 д .175 л.57.
4. Зав. ДВотдел . НКИД ( 외무인민위원부 극동부장 ), Товарищу Сафарову ( 사파로프 동무에게 ), 1922년 2월7일,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57 л.2.
5. Член объединенного ЦК Корейск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и Бывший председатель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Корейского временн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Ли Дон - Хи (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 및 한국임시정부 전 국무총리 이동휘 ), Тов . Куусинену , Генеральному секретарю ИККИ ( 국제당 집행위 총비서 쿠시넨 동무에게 ), 1922년 2월12일, с .7,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66 л.1-6об.
6. ‘ 김규식씨 歸滬 , 최창식씨와 함께’, 독립신문, 1922년 6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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