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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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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왜 ‘18억원 이적료’ 스미스가 못 나올까

닳은 운동장 뛰다 무릎 부상 입는 여자 선수들 고통…선수 규모는 선진국 500분의 1 불과
등록 2025-08-22 13:37 수정 2025-08-27 08:18
캐나다 출신 공격수 올리비아 스미스가 2024년 12월3일 스페인 무르시아의 피나타르 아레나 풋볼 센터에서 열린 한국과 캐나다의 국제 여자축구 친선경기에서 슈팅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캐나다 출신 공격수 올리비아 스미스가 2024년 12월3일 스페인 무르시아의 피나타르 아레나 풋볼 센터에서 열린 한국과 캐나다의 국제 여자축구 친선경기에서 슈팅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축구 같이 해도 돼요?”

서울 마포구의 한 공원에서 5~6명이 공을 차자, 이를 지켜보던 여성이 멋쩍게 물어본다. “네, 같이 차요”라고 하자, 열심히 뛴다. 20년도 더 된 기억이 선명한 것은 깨달음 때문이다. 축구는 남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축구할 권리 세우기는 기자의 평생 화두가 됐다.

성평등 관점에서, 20년 전과 오늘의 축구 불평등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대한축구협회 통계 사이트 ‘조인 케이에프에이’(Join KFA)의 선수 등록 현황을 보면, 2024년 남성 대비 여성의 비율은 전문선수 4.8%, 동호인 선수 4.5%로 두 영역 모두에서 5%를 넘지 못한다. 한국스포츠과학원이 발행하는 ‘2022 한국의 체육지표’에 따르면 골프(82%), 배구(77%), 수영(65%), 배드민턴(63%), 볼링(63%)은 물론이고 농구(10%), 복싱(10%) 종목의 여성 비중보다도 훨씬 낮다.

남성이 아닌 다른 나라와 견줘보면 어떨까. 세계인구리뷰의 2023년 20살 이상 여자축구 선수 규모에서, 한국(2963명)은 미국(172만 명)이나 독일(10만636명), 스웨덴(7만7966명), 네덜란드(5만373명), 일본(4만3589명) 등 주요 선진국의 10분의 1~500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선수 인프라’와 견줘보면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의 세계랭킹이 전체 196개국 가운데 21위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자 차범근’ 기대 넘치던 고교생 향한 제도 폭력

불일치, 모순, 부조리함은 한국 스포츠의 일반적 현상이다. 여자축구도 예외가 아니다. 2010년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U17 여자월드컵에서 여민지(제프 유나이티드) 선수는 대회 우승과 득점왕·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쥐어 3관왕에 올랐다. 세계 여자축구의 ‘차세대 지존이 출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현재 그의 잠재력은 끝내 만개하지 못했다. 중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이미 십자인대를 다친 그는 월드컵 출전 뒤 국내 고교 대회에 무리하게 출전하면서 십자인대가 또 끊어졌다. 부상은 고질이 됐고, 다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에 묶여 특유의 저돌적 돌파 능력은 사라졌다.

2003년 피파 미국 여자월드컵에 17살 고교생 박은선이 나타났을 때, ‘여자 차범근’이라는 기대가 넘쳤다. 그가 2005년 고교 졸업 뒤 대학에 가지 않고 서울시청에 직행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방황한 것은 결국 기득권이 만든 제도의 폭력 때문이었다. 2013년 다른 팀 감독들이 ‘박은선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별검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더블유케이(WK)리그 역사의 최대 오점이다. 2015년 11월 이천 대교 선수로 WK리그 경기 중 부상해 수술받은 그를 찾아갔을 때다. 병실에서 딸을 돌보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네요. 아니 어떻게 이런 상태로 공을 찼느냐고….”

2000년대 인조잔디가 닳아 딱딱해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뛰다가 무릎 부상으로 들것에 실려 나간 많은 여자 중고교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학생과 학부모의 고통을, 축구를 선택한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돌릴 수 있을까.

2025년 7월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국내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대회에서 우승했다. 34살 지소연(시애틀)과 수비수인 35살 김혜리(우한)를 비롯해 베스트 11의 상당수를 2010년대 등장한 세대들이 차지했다. ‘또 지소연이냐’라는 말이 나왔다. 보호·성장·투자가 없는 ‘3무’의 상황에서 선수와 학부모, 뜻있는 지도자들의 헌신과 분투, 눈물 속에 여자축구의 명맥이 이어져온 것은 아닐까.

2021년 11월30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한국-뉴질랜드 여자축구 친선경기 2차전에서 여민지 선수가 드리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11월30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한국-뉴질랜드 여자축구 친선경기 2차전에서 여민지 선수가 드리블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스널로 옮긴 스미스, 우리와 너무 먼 얘기

2025년 7월 캐나다 출신 공격수 올리비아 스미스(21)는 최초로 100만파운드(한화 18억6천만원) 이적료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여자프로축구 WSL리그(1부) 리버풀에서 아스널로 옮겼다. 남자축구의 라민 야말(FC바르셀로나·1억6900만파운드)에 견주면 미미하지만, 10여 년 전 잉글랜드 여자축구 선수의 주급 50~100파운드(9만~18만원)에 견주면 격세지감이 있다.

2025년 7월 스위스에서 열린 2025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전체 31개 경기 가운데 29개가 매진됐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결승전은 3만4203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피파는 2023년 오스트레일리아(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에서 처음으로 흑자(5억7천만달러)로 전환했고, 2031년 미국 여자월드컵부터 참가국을 48개팀으로 늘린다. 돈이 된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스미스가 나오기 어렵다. 초등학교 여자축구부는 전국에 15개뿐이다. 클럽팀 5개를 합쳐도 20개다. 충청남도에는 초등학교 축구부도, 클럽팀도 없다. 중학교(13개)와 고등학교(11개) 팀의 경우, 부산에는 중학교, 광주와 세종에는 중·고 학교팀이 없다. 대학은 최근 동원대가 해체되면서 전국에 7개만 남아 있다. 이렇게 기초부터 성인 무대까지 선수층 구성이 피라미드가 아니라 통나무 형태인 것은 기형적이다.

축구를 하기 위해 다른 시·도로 이주하는 일은 일반적이다. 우상범 경기도 비룡초 축구부 감독은 “우리 학교에도 남자팀과 함께 뛰는 여자 선수가 있다. 졸업하면 충남 강경중으로 간다. 집 주변에 학교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나마 특성화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기숙사를 갖추고 있고, 전국 단위로 학생 모집이 가능해 입학할 수 있다. 일반 학교의 남녀 축구부에 자녀를 보낼 경우 부모는 위장전입 등 불법을 감수해야 한다. 2008년 시작된 전국 권역별 초·중·고 리그에도 여자팀은 참여가 불가능하다. 팀이 없으니 전국대회가 유일한 강대강 대결 무대가 된다.

한국여자축구연맹 전임 집행부(2009~2024년)의 15년 정책 실패가 황금기를 날렸고, 대대적인 예산 투입 등 통 큰 결정을 내리지 못한 대한축구협회의 한계가 빚은 결과물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2011년 출범한 잉글랜드의 여자프로축구 WSL리그를 비롯해 2, 3부에는 리버풀, 첼시, 아스널 등 남자 1부리그가 운영하는 팀이 참여하고 있다. 호주의 여자 A리그는 2008년 출범했는데, 대부분의 남자 프로팀이 여자팀을 보유하고 있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의 1부리그 남자팀도 다수 여자팀을 운영한다. 유럽축구연맹은 클럽 대항전 등에 뛰기 위한 조건으로 여자축구팀 보유를 의무화하고 있다.

2025년 7월 27일(현지시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UEFA 여자 유로 2025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의 알레시아 루소(오른쪽)가 스페인의 라이아 알레이샨드리 옆에서 1-1 동점골을 넣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5년 7월 27일(현지시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UEFA 여자 유로 2025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의 알레시아 루소(오른쪽)가 스페인의 라이아 알레이샨드리 옆에서 1-1 동점골을 넣고 있다. EPA 연합뉴스


“프로팀 산하 유스팀이 여자축구부 둔다면”

국내 K리그 1부(12개), 2부(14개) 팀이 여자축구팀을 만든다면, 이는 한국 여자축구의 판도를 바꿀 효과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구단주인 부산 아이파크(2부)는 유소녀팀 창단에 가장 적극적이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프로팀 산하 유스팀이 여자축구부를 둔다면 팀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 학부모들도 프로팀에서 운영하는 여자축구팀에 신뢰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전국의 체육중학교(12개), 체육고등학교(17개)는 기숙사 시설이 갖춰져 있다. 기초·비인기 종목을 전략 육성하는 이들 학교가 여자축구부를 만들면 폭발력이 크다. 교육부도 성평등 차원에서 여자축구의 확산이 필요한 만큼 전향적으로 고민할 때다. 2025년 9월 충남 천안축구종합센터가 완공되면, 완벽한 시설과 뛰어난 접근성으로 한국 유소년축구가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2010년 여자축구의 국제대회 성과에 바짝 신경 썼던 정부도 여자농구, 여자배구처럼 WK리그 경기를 스포츠토토 종목으로 편입해 최소한의 재정 확충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반 여학생들의 참여를 위해 입시에서의 가점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임성철 경기도 운산고 교사는 “여학생 스포츠에 방점을 둔 학교스포츠클럽 활동도 2010년 초기의 급팽창에 비해 지금은 분위기가 죽었다. 체육교사들의 자발성에도 한계가 있다. 생활기록부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클럽 활동이 기록돼, 입시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22 한국의 체육지표’를 보면 국민은 체육활동이 신체건강(85.8%)과 정신건강(86%)에 미치는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상생활(74.8%)과 의료비 절감(55.8%)에도 영향을 준다고 답변했다.

2010년 9월26일 국제축구연맹(FIFA) U17 여자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국대표팀이 기념촬영을 하며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9월26일 국제축구연맹(FIFA) U17 여자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국대표팀이 기념촬영을 하며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생건강 좌우하는 운동, 공평하게 누리게

학교에서 아이들이 스포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은 국민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생 운동감각의 바탕이 되는 기본움직임기술(Fundamental Movement Skill)의 습득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주로 이뤄진다. 만약 초등학교 등 공교육이 스포츠 활동 기회를 주지 못한다면, 형편이 어려워 동네 클럽에 등록할 수 없는 아이들 입장에선 불평등이 심화하는 셈이다. 수요가 큰 축구의 경우 선수반이나 취미반 구분 없이 학교마다 통합 1, 2, 3부 체제로 나눠 근거리 지역 간 대결의 틀을 만들어준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나이키 프리미어컵 여자 U15 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김광석 울산 현대청운중 감독은 “축구하는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만, 구조와 환경을 바꾸면 여자축구 시장은 커진다. 남자 유소년 선수도 조금씩 늘고 있다. 완전히 판을 바꿔야 한다. 축구를 시작한 아이들의 눈빛은 게임하는 아이들과도 다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고민해볼 대목”이라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여자축구의 세계적 스타 올리비아 스미스도 초등학교 시절 남자 틈바구니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하지만 태권도로 단련된 정신력과 부상 방지를 위한 체력훈련, 스피드 장착으로 최고의 선수가 됐다.

자녀의 스포츠 활동에 대한 학부모의 인식도 중요하다. 운동하다가 다치면 피해보상 소송을 내는 학부모의 극성에 체육교사가 자살에까지 몰리는 상황은 극단적이다. 축구하는 아이들은 부딪치고, 멍들고, 부러지면서 성장한다. “1970~1980년대 아이들이 친구들과 뛰어놀던 그 축구는 어디에도 없고 어른의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재단돼버렸다”(윤영길 한국체육대 교수)는 한탄에는 학부모의 책임도 있다.

‘공부 잘하는 약’이란 잘못된 소문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약을 처방받는 부모가 늘었다는 보도는 이상 징후다. 국·영·수의 나라, 입시에 올인하는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배려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잊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여자축구는 인권이며,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이슈다.

그래서 다시 여자축구다. 지구촌과 한국의 모든 여성이, 여자축구의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김창금 한겨레 선임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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