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체육관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맨바닥에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거나 실신한 듯 누워 있다. 안쪽 단상에는 수많은 영정사진과 위패가 도열해 있다. 단상 옆으로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가족대책위원회’ ‘삼풍유가족협의회’ 등의 명의를 단 근조화환이 늘어서 있다. 정부 관계자가 나타나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구하자 누군가 나서 먼저 상황부터 설명해달라고 따진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맞장구친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도 아는 게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곳은 어디인가. 무안스포츠파크가 아니다. 용산다목적체육관도, 진도체육관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한 장면이다. 약 20년 전 영화 속 정부의 모습은 어느새 클리셰가 돼버렸다. 앞장서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가 가장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대책 수립은커녕 원인도 파악 못하며 가족들의 절박한 구조 신호를 무시한다. 1300만 관객이 든 영화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제 잘 안다. 한국에 참사가 발생하면 으레 예상되는 수순을. 지금껏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유명무실했고 원인 규명은 한없이 늘어졌으며 유족들의 요구는 이행되지 않았다. 잠깐의 애도를 마친 후엔 보상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과 책임 소재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또 하나의 ‘유가족협의회’가 생기고 이들이 오래도록 힘겹게 문제를 해결해왔다.
흡사 재난 수습의 ‘경로의존성’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다리가 무너지고, 열차에 불이 나고, 배가 가라앉고, 도심 한복판에서 수백 명이 죽고 다쳤던 그 모든 순간마다 한강에 괴생명체가 출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왕좌왕 허둥대던 정부를 보며 배운 불신이다. 유가족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더니 이들을 기어이 카메라 앞에 세우고 엄동설한의 거리 농성장으로 내몰다 끝내 불볕더위에 삼보일배까지 시키는 정치의 무책임함에 분노하며 인이 밴 불신이다.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울분을 참아가며 수일째 냉동컨테이너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또 한 번 불신을 학습했다.
국가폭력의 책임을 묻고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결성된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과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이래 수많은 ‘(유)가족’협의회가 탄생했고 여전히 긴 고통 속에 있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은 아닐지언정 사태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면 그 역시 폭력이다. 애도의 시간과 공간을 서둘러 박탈하고 잊을 것을 강요하는 것 또한 폭력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알리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동안 삭고 해졌을 협의회 천막 아래서 그들은 앞서간 가족의 죽음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산 자의 삶을, 비극의 배경이 된 세상을, 가족이 아닌 남의 인권을 이야기한다. 회원 자격도 없고 회비 한번 낸 적 없으나 우리가 협의회들의 슬픔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주항공 참사로 온 나라가 비통에 빠졌다. 슬픔에 더해 국가체계에 대한 불신이 강화될까 두렵다. 더구나 지금은 장기화된 의료대란과 12·3 내란사태로 일상의 안전마저 위협받는 상황 아닌가. 정부와 정치가 반증해야 한다. ‘초유의 권한대행’이더라도 총력을 다해 사태를 수습하고, 정확한 원인을 밝혀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 한다. 부디 이번에는 ‘유가족협의회’가 제 소임을 다하고 기꺼이 해산할 수 있기를, 우리의 귀납적 추론이 정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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