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다. 운명이 조정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정해져 있다고 믿는 이들도 운명을 알고자 한다. 비판자들은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안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묻겠지만 정해진 것이기에 비록 어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안다’는 것만으로도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것은 예기치 못하게 당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당하는 것이 수동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은 능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을 강하게 믿는 사람들이더라도 결코 수동적이지 않고 싶은 것이 인간의 몸부림인 셈이다.
운명에 대처하는 고전적인 방법이 주술이다. 정해진 운명을 회피하기 위한 주술도 있고, 저주하는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 운명을 바꾸기 위한 주술도 있다. 주술은 세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 즉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에 압도돼 나약하게 미신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주술에는 주술 특유의 문법과 논리가 있으며 그 방법을 이용한다. 근거가 없더라도 나름대로 당시 인간의 박물학적 지식이 총동원된 것이 주술이다. 현대로 보면 지식에 반하는 맹목적인 미신이지만 그 당대에는 지식의 총합인 셈이다. 비록 실행자가 그 기초가 되는 이론을 모르고 행하는 실천적인 주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주술과 터부에 대해 가장 고전적인 사례를 집대성해 이론화한 ‘황금가지’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에 따르면, 주술은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하나는 유사 원리다. 유사는 유사를 낳으며 결과는 항상 그 원인과 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유사 원리에 의한 것이 동종주술이다. 적과 닮은 것을 만들어서 불에 태우거나 저주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날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아래에 나오는 사례는 대부분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접촉 원리다. 한번 접촉해 있던 것은 끝나서 떨어져 있더라도 계속 상호작용하거나, 원래 있던 것의 힘을 계속 지니고 행사한다. 접촉 원리에 의한 것이 감염주술이다. 초상화에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붙여놓으면 주술의 힘이 배가된다. 쥐가 손톱을 먹고 그 사람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런 접촉 원리에 따른 감염주술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접촉 원리에 응용되는 것 중에서 특이한 것이 ‘이름’이다. 접촉 원리는 주로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과 같은 육체적인 것을 따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비물질인 이름이야말로 접촉과 감염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은밀한 힘을 가진 ‘그 사람의 것’으로 여겨진다.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이름은 마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름은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알면 그 대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마법을 공부하는 것은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작명은 단순히 예쁜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름은 또한 감춰야 하는 것이 된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라우칸족은 객지 사람에게 절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모르는 외부 사람이 자기 이름을 물으면 “난 이름이 없소!”라고 대꾸한다. 이름을 아는 것이 곧 그 존재를 아는 것이며 그 존재를 알면 초자연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브라만들은 태어나면 두 개의 이름을 짓고 하나는 부모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이 이름은 결혼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비밀스럽게 사용한다.
동종주술이나 감염주술 모두 원래의 것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그림이나 인형이 더 그 사람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일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비슷하게 그린 그림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사진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 혹은 비전이라는 영혼을 보여줘야 한다. 아프리카의 토고나 베냉과 같은 곳에서는 인간에 대한 형상이 매우 기하학적이다. 조잡해 보이는 부적에서도 의외로 이름과 형상 모두의 본질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감염주술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몸에서 떨어진 부스럼보다는 머리카락, 손톱이나 발톱이 더 강하다. 핏방울의 경우에는 말도 못할 힘을 가진다. 그 사람의 생명력을 직접적으로 나누어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손발보다는 머리나 심장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아즈텍과 같은 문명에서는 인신공희를 할 때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 불태우는 것으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래서 강력한 주술을 걸고 싶을수록 그 사람의 본질과 생명에 더 직접적으로 닿은 것을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여기에 주술의 역설이 있다. 강력한 힘은 직접성에 있지만 정말 직접적인 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공격이 되기 때문에 굳이 주술일 필요가 없다. 저주를 걸기 위해 구태여 그 사람의 머리나 심장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것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저주를 걸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면 너무 직접성에서 멀어지면 그 사람에 대한 표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주술의 힘을 걸 수가 없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의 실어증에 대해 쓴 강유정 강남대 교수의 글 ‘영화에서의 은유와 환유’에 따르면, 동종주술은 은유인데 은유가 너무 멀어지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돼버린다. 감염주술은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환유와 같은 것인데 너무 부분이 되면 전체의 문장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전보의 문구와 같은 것이 된다. 둘 다 실패한 주술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술에는 ‘상당한’ 문학적 역량이 필요하다. 시시한 주술사라고 한다면 선배들이 하던 대로 상투적인 마법이나 주술을 따라 할 것이다. 사실 그 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실행만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주술을 도입하려는 사람이라면 은유와 환유에 능숙해야 한다. 너무 멀어서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너무 직접적이어서 위험한 것도 아닌 그 둘 모두와 거리를 두며 창의적인 어떤 것으로 대중에 새로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공감이란 사회를 조직하거나 파괴하는 새로운 상상력으로서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실제로 프레이저는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을 합친 주술을 ‘공감주술’이라고 명명했다.
인간에게 높은 수준 윤리 제시하는 ‘터부’주술이나 터부는 자연적인 힘을 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 원리가 된다. 피억압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권력의 절제를 요구하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뉴질랜드의 대추장은 일종의 미다스의 손이다. 그의 피가 묻은 것은 그 순간부터 대추장의 생명을 나눠 갖게 돼 신성한 것이 되며, 대추장의 소유가 된다. 대추장만의 신성함이 접촉을 통해 전염됐기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접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대추장의 것이 되는 위험이 있다. 이런 경우 권력자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족 사회들도 있다. 주술이 권력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터부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절제를 요구하는 사례는 이누이트 우나리트족의 사례일 것이다. 이들은 포경해 먹고산다. 흰고래를 잡은 날이면 포경사뿐만 아니라 도운 사람들까지 나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비록 고래는 죽었지만 고래의 그림자와 영혼이 나흘 동안은 고래의 몸에 머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마을 사람들은 예리한 칼날을 사용하지 않는다. 밖에 칼이나 바늘을 걸어두거나 사용하면 나흘 동안 고래의 영혼이 마을을 떠돌다 상처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래를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고래를 잡아 죽일 수밖에 없지만 고래의 영혼은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극한 배려의 마음이며 절제의 행동이다.
이렇게 보면 주술, 특히 터부는 인간에게 높은 수준의 윤리를 가져온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터부는 나에게 해로운 타자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만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우나리트족의 사례처럼 우리가 타자에게 위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피에르 자우이가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에서 밝힌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세계에 대한 공경’이라고 불렀다. 나를 지키고 타인을 저주하기 위한 주술에 비교한다면 그 어떤 ‘문명인’도 따르지 못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유의 기술이다. 자유의 의미가 자신에 대한 절제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름에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은 이름 하나를 잘 지어서 평생 행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인식론적 혁명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를 성행위에만 ‘미친’ 존재라는 비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라는 뜻의 동성‘애’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한 예일 것이다. 물론 이름을 바꾼다고 인식과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시작한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주술과 터부, 명리학에서 ‘근대인’이 배워야 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진짜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사태의 본모습에 가닿으려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운명을 아는 자로서 어떻게 운명의 파고를 넘나들 것인지, 때로 그렇게 파고를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운명에 맞서는 것으로 인간의 가능성, 즉 능동성을 고양하려고 한 마음일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을 지닌 자기를 절제하는 기술로서의 터부일 것이다. 이왕에 주술과 명리학, 터부라면, 이렇게 세계를 보좌하는 자유의 기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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