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4일 자정쯤 박아무개씨는 경남 진주에서 지인과 술을 마시며 “페미니스트들이 이 세상을 다 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박씨는 편의점에서 상품을 바닥에 던지는 등 소란을 피우다 종업원인 A가 이를 제지하고 신고하려 하자 A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작동시킨 뒤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며 무차별 폭행했다. 다른 손님 B가 이를 말리자 박씨는 “왜 남자 편을 들지 않느냐, 저 여자는 페미니스트다”라며 B도 폭행했다. 경찰이 출동해 지구대로 이동한 박씨는 A가 피해자 진술을 하는 방문을 발로 차며 “페미년아 얘기하냐, 얼굴 좀 보자”고 소리 질렀다. 박씨는 경찰에 본인을 ‘(신)남성연대 부대표, 후임’이라고 소개하며, A가 자신을 먼저 폭행하거나 성희롱·성추행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피해자들과 일면식도 없었다. 이 범죄는 ‘진주 편의점 쇼트커트 여성 상해 사건’으로 공론화했다.
경찰은 자신을 ‘(신)남성연대 회원’이라고 주장한 박씨의 온라인 관계망 등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나마 검찰이 보완수사로 박씨의 여성혐오 발언 등을 밝혀냈다. 이를 토대로 검찰은 박씨가 ‘페미니스트는 여성우월주의자로 정신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하에 쇼트커트 머리모양을 한 A를 페미니스트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혐오감을 표출한 혐오범죄를 저질렀다며 구속기소했다. 폭력범죄의 특별양형인자(가중요소)인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 등 측면에서 범행 경위·동기를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서 피해자 지원제도에 대한 안내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편의점주 C가 A의 치료비를 선납하는 등 서로 도우며 버텼다. 언론 보도를 본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정윤정 소장이 경찰에 연락해 뒤늦게 A와 연결되면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등의 지원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심적 안정을 찾아가던 A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건을 알리며 연대를 요청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조력한 지역 기반 반성폭력 단체 활동가들에 이어 여성의당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기반한 테러행위로 규정해 적극 대응하면서 시민들도 연대에 동참했다.
그러나 1심은 피고인 쪽 전략대로 끌려갔다. 변호인은 피고인이 심신장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치료감호가 필요하다며 정신감정을 신청했다. 재판부가 이를 수용하며 재판이 지연됐고, 법관 정기인사까지 겹쳐 재판부가 교체되면서 피해자들의 불안은 커졌다. 국립법무병원의 정신감정 결과가 전달된 뒤 진행된 두 번째 재판에서 이런 불안은 현실이 됐다.
공판일자가 나오기 전 나는 피해자 의견진술권에 대해 피해자 쪽에 전달했고, A는 검사를 통해 양형증인(유·무죄와 관련 없이 형벌의 경중을 정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 신문하는 증인)의 형태로 의견진술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판사는 피고인 변호인이 난색을 표하자 검찰이 신청한 A의 양형증인 채택 요청을 불허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실명을 직접 언급하며 증인신문 형태가 아니더라도 의견진술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비록 이후 피고인이 퇴정했지만 사실상 강요에 가까웠던 재판 절차 때문에 A는 불안한 상태에서 준비 없이 방청석에서 의견진술을 해야 했다.
결국 두 번째 공판이 바로 결심(선고 전 변론종결 단계)이 됐다. 검찰은 기소 당시 이 사건을 혐오범죄라고 규정했음에도 정작 구형 및 최종의견을 전하는 과정에서는 이 사건을 ‘이상동기 범죄’로 모호하게 표현했다. 특별양형인자로 반영되어야 할 ‘비난할 만한 동기’를 바탕으로 이 사건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반면 피고인 변호인은 국립법무병원 회신 내용을 근거로 사건 당시 피고인이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음이 증명됐다며 선처 혹은 치료감호를 요청했다.
첫 공판에서 변호인과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외쳤던 피고인은 결심에서는 정반대로 본인의 정신적인 문제를 강조하며 선처를 구했다. 자신은 이 사건 이전에는 ‘청렴결백한 삶’을 살아왔으며 피해자들의 연락처를 몰라 연락을 못했을 뿐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피고인은 피해자 연락처를 알았고, 사선으로 변호사를 선임했음에도 합의금을 줄 형편이 안 된다며 집행유예가 선고되면 월 20만원씩 주겠다고 변호사를 통해 제안한 것 외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합의를 거절하고 형사배상을 신청하거나 민사 손해배상 청구를 준비 중이다.
검찰은 피해자들을 양형증인으로 채택해달라며 변론재개를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또 불허했다. 선고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구조자이자 피해자인 B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A가 청력손실로 영구장애에 이르렀고, “딸 같아서” 온몸으로 피고인을 막았던 B가 일자리를 잃고 일용직을 전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심 결과에 대한 외부 관심이 커졌다. 제22대 총선을 하루 앞둔 2024년 4월9일, 선고를 지켜보기 위해 난 또 진주로 향했다.
그런데 판사(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3단독 김도형 판사)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병원 진단 결과, 대검찰청 임상심리평가를 들어 피고인이 심신미약 상태였음을 밝히는 부분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판사는 범행 경위, 범행 동기(피고인 언행), 폭행 수위, 범행 수법을 들어 이것이 피고인이 사건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라고 말했다. 여성혐오로 인한 심신미약은 감경될 수 있다는 의미다. 판사는 박씨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여성혐오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구조자를 포함해 다수 피해자를 폭행했으며, 범죄자들 사이에서 증거인멸방법(실제로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능)으로 알려진 ‘휴대전화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수법 등을 이용했다는 게 어떻게 심신미약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건 직전 술자리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후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 먼저 시비를 걸고 폭행한 일련의 과정이 그저 원래 정신적으로 취약했던 남성이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인가?
판사는 특별양형인자 중 ‘중한상해’ 정도만 반영했을 뿐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는 반영하지 않았다. 혐오·증오범죄를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로 돌리고, 이를 오히려 선처의 근거로까지 제시한 이번 판결은 여성혐오 범죄자들에게 또 다른 무기를 쥐여준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국외에서 여성 대상 폭력·살인사건을 여성혐오에 기반한 테러행위(혐오·증오범죄)로 규정해 엄격히 처벌할 때, 한국에서는 법원이 여성혐오를 피고인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치부하고 심지어 감경요소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조금 더 고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A가 밝힌 심경의 일부다. 신중하고 차분하게 심정을 전하려 노력하던 A가 이런 말을 공식적으로 내뱉게 된 것은 사법시스템이 피해 회복이라는 또 하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배제·소외당하지 않고, 과정과 결과 모두 피해자가 수용·납득할 수 있게 될 때 사법시스템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는 ‘엄벌’은 그런 의미다. 제대로 된, 합당한 처벌이 있을 때 피해 회복이 시작될 수 있음에도 법대에 앉은 판사들은 이를 잊는 모양이다. 검사와 피고인 모두 항소하면서 이 사건은 창원지법 항소부로 넘어간다. 이제는 창원으로 간다. “피해자들과 피해자와 연대하고 있는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기자회견문 일부)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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