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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보다 ‘시발, 멍청’ 하지 않다

한겨레21×한겨레교육 공동기획
‘시발비용’이 ‘충동구매’와 다른 점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라는 점, 삶 자체가 거대한 불행이라는 세계관을 공유한 세대의 소비
등록 2024-03-01 07:18 수정 2024-03-21 07:53
분노, 슬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은 소비를 촉발한다.

분노, 슬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은 소비를 촉발한다.


시발비용으로 24만원을 지출했다. 새로 산 폴더폰 값이다.

취업하고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으로 푼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하지만 폴더폰 구매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스마트폰 중독을 고쳐보자는 것이었다. 퇴근하면 바보처럼 멍하니 스마트폰을 했다. ‘갓생’(God+生, 모범적이고 부지런하게 잘 사는 삶)을 위한 투자 비용치고 24만원이면 저렴했다. 아니, 그렇게 합리화하고 질러버렸다. 지친 몸으로 스마트폰을 하면서 또 지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돈을 쓰세요. 화병과 우울에 효과 빵점입니다

‘tlqkf’. 요즘 폴더폰은 터치도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할 수 있다. 예상하다시피 내 폴더폰은 자판 달린 스마트폰이 됐다. 서랍 속에서 아이폰 공기계를 꺼냈다. 이마를 빡빡 치며 자조했다.

친구들에게 시발비용 최고가 경신 소식을 들려줬다. 다들 자기 경험담으로 나를 위로했다. 친구 지민은 점심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다. 그러나 손님과 한바탕하고 홧김에 1만2천원짜리 돈가스 정식을 사 먹었다. 친구 주희는 상사에게 혼날 때마다 수만원대 캐릭터 인형을 사 모았다.

화나고, 짜증 나고, 우울할 때 우리는 시발비용을 쓴다. ‘시발’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쓰는 돈이다. 한국인의 정서로 흔히 한을 이야기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시발이다. 시발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 같은 부정적 감정의 총체를 경제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그 감정을 어찌할 수 없는 처지까지 함축한다. 멋진 말이다. 생애에서 희망보다 절망을 더 많이 느낀 세대가 사랑하는 말.

분노, 슬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은 소비를 촉발한다.

분노, 슬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은 소비를 촉발한다.


시발비용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시발비용은 충동구매의 아명이다. 마음의 자극으로 이루어지는 구매 행위. 사실 모든 구매는 충동구매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에서 소비는 감정 표현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재화를 구매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충동구매를 시발비용이라고 부를까? 충동구매가 미래를 향한 낙관이라면, 시발비용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다. 앞서 진상 손님 때문에 돈가스 정식을 사 먹은 친구 지민으로 예시해보자. 1만2천원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든든하게 먹으면 힘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 충동구매를 한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비스직의 애환을 비관했다면 시발비용을 쓴 것이다.

그래서 시발비용은 별것이 아니다. 포털에 시발비용을 검색하고 블로그와 카페 글을 찾아봤다. 옷, 향수, 가방, 키링, 치킨, 떡볶이, 마라탕, 디저트, 다이어리, 마스킹 테이프 같은 것들이 보였다. 폴더폰 24만원은 역시 과했다. 다시 한번 이마를 빡빡 친다.

시발비용으로 지출하는 작고 소중한 것들.

시발비용으로 지출하는 작고 소중한 것들.


여성은 시발비용을 많이 ‘쓴다’. 단어와 비용 모두. 대통령의 말마따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지만, 38개 나라 중 성별 임금 격차가 1위인 나라에서 여성으로 살기가 얼마나 벅찬지 방증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인 친구 세 명에게 시발비용을 ‘쓰냐’고 물었다. 두 명은 ‘모르며, 지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시발비용을 쓴다는 친구 우성은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그에게 최근 접객 스트레스로 지출한 시발비용이 있냐고 질문했다. 비싼 마스크팩을 샀다고 한다. “화병으로 주름 생긴 것 같아.”

 

알바생이라고 무시당해 속상한 서비스직 우성은 ‘거금 4천원’을 주고 마스크팩을 샀다.

알바생이라고 무시당해 속상한 서비스직 우성은 ‘거금 4천원’을 주고 마스크팩을 샀다.


멍청비용이라는 말도 있다. 멍청해서 쓴 비용이라는 뜻이다. 가령 비행기 표를 잘못 예매해서 취소하고 위약금을 냈다고 하자. 돈을 낭비했다. 이런 사실에 자신이 멍청하다는 가치 판단을 덧붙이면 낭비는 멍청비용이 된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까지 감지한 말, ‘시발’

시발비용과 멍청비용은 ‘잘못’ 소비하는 것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공유한다. 친구 현정은 얼마 전 실수로 반대 방향 버스를 탔다고 한다. 그는 버스 요금의 몇 배인 멍청비용을 내고 택시를 타야 했다. “나 왜 이렇게 멍청하지? 완전 시발비용 썼어.” 현정은 버스를 잘못 탔다는 사실 하나로 종일 우울했다고 한다.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은 마음 곳곳에 상처를 남긴다. 소비란 행복 플라세보 효과를 가진 알약을 먹는 것이다. 사람들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꺼이 알약을 먹으려 한다. 그러나 시발비용은 쓰라렸던 경험을 상기하며 바르는 소독약이다. 소독은 응급처치다. 새살이 돋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곪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고통스러워도 소독약을 바른다.

어느 세대든 삶에서 상처받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 소비는 가장 흔한 수단이다. 엠제트(MZ)세대의 소비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강한 충동에 이끌려 구매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낭비한다. 하나 오늘날 우리는 소비하는 그 순간에 행복 못지않은 불행을 느낀다. 삶 자체가 거대한 불행이라는 세계관을 공유해서일까.

‘동네북’ MZ들에게.

‘동네북’ MZ들에게.


우리는 생각보다 ‘시발, 멍청’ 하지 않다. 내가 아는 친구들은 시발비용과 멍청비용을 쓰면서도 알뜰폰과 알뜰교통카드를 쓴다. 쥐꼬리 월급에 다달이 주택청약과 청년희망적금을 넣는다. 쇼핑몰 후기를 써서 차곡차곡 적립금을 모은다. 단지 스스로 ‘시발, 멍청’ 하다고 탓하라는 교육을 받아온 것뿐이다. 소비도 시험처럼 합격을 판가름하는 정답이 있을 거란 환상 속에서.

글·일러스트레이션 이성희

*미지의 소리: MZ는 어떻다, 뭐가 다르다… 이런 구구절절한 제삼자의 평가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MZ 당사자가 말하는 MZ. 4주마다 연재.

##선정하며- ‘MZ’ 의 이질성과 모순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를

‘MZ 소비 생활’을 주제로 총 21편의 글이 도착했다. 내가 기다린 글은 이랬다. ‘MZ세대’의 이질성과 모순을 들여다보고, 소비문화의 구체적 실감 속에서 정치적 관점을 발견한 이야기.

투고작들은 모두 MZ라는 명명을 의심했고, 소비의 다양한 문화적 상징을 고민했다. 하지만 대체로 비판의 깊이가 아쉬웠다. 먼저 MZ라는 이름을 거부하다가, 사회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주체라는 전제로 닿은 경우가 있었다. 또한 MZ는 기성세대의 청년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다가, 차이와 갈등이라는 정치적 역동성에 대한 검토 없이 화합이나 정상-가족주의적인 결론을 내린 경우도 있었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기댄) 여성 소비자에 대한 편견을 굳힐 수 있는 서술도 있었다. 

선정작인 이성희씨의 ‘욕은 절대 아니고요, 그냥 시발입니다’는 ‘시발비용’(홧김에 쓰는 돈)의 사회적 의미를 재발견했다. 청년 소비의 양가성을 드러내는 와중에 기성세대의 소비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 고유한 통찰을 담았다. 특히 ‘시발비용’이 여성에게 특화된 현상임을 주목했다. 또 과감하면서도 재치 있는 문체는 그저 팬시한 스타일이 아닌, 현상에 대한 풍자를 형식으로도 풀어낸 목소리였다. 결론 부분의 “소비도 시험처럼 판가름하는 정답이 있을 거란 환상”처럼, ‘정상소비 이데올로기’ 고민을 더욱 밀고 나가기를 바란다.

권나은씨의 ‘너의 전시가 나를 괴롭게 해서’는 MZ를 정확히 옹호하려 시도했다. 세대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유용함을 주장했다. ‘공출목(아이돌의 공항·출퇴근·목격담) 소비 안 해요’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소비 지양’ 문화가 개인화·탈정치화됐음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자발적 행위라기보다 커뮤니티 의존적 현상임을 말했다. 다만 온라인 공간에 대한 분석이 아쉬웠다. 온라인에서 마주하는 정보의 규모가 크다고 곧 메시지가 반사·충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희석되거나 연대하는 효과도 가능하다. 또한 “타인을 침해”하는 것 자체는 (특히 민주주의에서) 삶의 조건이다. 공간의 물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역동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이 밖에 청년 사이 문화 계급적 차이를 선명히 드러낸 양빈현씨, 586(5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과 MZ 모두 빈곤 노인 및 대졸자·정규직 외의 노동자가 소외됐음을 구체적으로 짚은 김나연씨, 더현대 서울에서 맞은 세상의 종말 와중에 취직의 꿈을 이루면 사려 했던 구두를 신는 주인공을 통해 청년의 마음을 표현한 이나연씨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앞으로도 담론의 정치적인 효과를 고려하며 독자와 창의적으로 관계 맺는 글이 쓰이기를 바란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다음 주제: ‘내가 꼭 지키려 하는 시성비는 무엇인가’ ‘가성비, 가심비, 시성비 중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선택)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2024년 3월24일(일) 밤 12시 마감

발표: 제1507호(4월8일 발행 지면)

문의·접수 leejw@ hanien.co.kr

원고료 당선작 1편 1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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