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제: 내가 매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과 그 이유
분량: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2024년 8월18일(일) 밤 12시
발표: 제1528호
문의·접수: leejw@ hanien.co.kr
※ 응모시 메일 제목은 [미지의소리_이름]으로 기재 부탁드립니다.
원고료: 당선작 1편 10만원, 한겨레교육 마일리지 10만점
※ 마일리지는 한겨레교육 모든 강의에 사용 가능합니다.
※ 마일리지 사용기한: 적립일로부터 한 달 내
지난 당선작: 영혼까지 끌어모은 나만의 덕질
자신을 가꾸면서도, 티 없이 사랑스러울 것. 멍청하게 굴면서도, 적당히 남의 기분에 맞출 줄 아는 지혜를 갖출 것. 성적 매력을 갖춰야 하지만, 순수함을 유지할 것. 한국 사회에서 ‘소녀’로 산다는 건 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나는 둘 중 하나에 과도하게 무게가 실려 줄에서 추락하는 수많은 소녀를 목격했다. 어디까지 알아야 하고, 몰라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즐길 수 있고, 없는 걸까. 어디까지 드러내고, 숨겨야 하는 걸까. 명확한 기준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내게도 줄에서 추락했던 순간이 있었는지 모른다.
줄 위의 풍경이 주는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2015년의 어느 날, 아이유의 《CHAT-SHIRE》(챗셔) 앨범을 만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는 줄 위의 곡예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여우”인지 “곰”인지 맞혀보라는 질문은 소녀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았던 나의 시간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았고, “애초에 나는 단 한 줄의 거짓말도 쓴 적이 없”다는 진술은 내가 ‘소녀다움’의 규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댄스음악이라는 경쾌한 장르가 ‘소녀’가 짊어진 무거운 삶을 날려보냈다. 한순간 발바닥도 덮지 못하던 줄이 드넓은 대지가 된다. 이 이상의 짜릿한 위로는 없었다.
그러나 세간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모티브로 한 앨범 수록곡 <제제>에서 소설의 다섯 살 주인공인 ‘제제’를 성적 대상화 했다는 게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비판과 옹호의 목소리가 오가더니, 초점이 ‘롤리타 콤플렉스’ 재현에 대한 윤리 문제로 번졌다. 문제 대상 또한 《CHAT-SHIRE》 앨범 전반으로 확대됐다. 작품의 창작과 해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며 논란을 ‘파시즘’과 연결 짓는 사람들, 보수적 성 관념과 아동에 대한 보호주의적 관점에 기반해 아동과 성을 연결 짓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 대중문화 내 여성/아동의 성 상품화를 우려하는 사람들…. 온라인에서 많은 말이 난무했지만, 무엇도 나의 짜릿함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인디 음악가를 좋아하듯 남몰래 그의 음악을 듣고, 그의 행적을 좇았다.
내 남다른 ‘덕력’이 빛을 발한 건 7년 후. 그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졌고, 스쿨미투,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 사건, 의제강간 연령 상향 논의 등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경유하는 이슈가 터져나왔다. 내 나름대로 공부를 통해 이에 대한 해석의 틀도 갖춰가던 차에, 학교에서 논문을 쓸 기회가 생겼다. 아이유와 《CHAT-SHIRE》를 대상으로 소녀성에 관한 논문을 쓰기로 했다. 나를 괴롭혔던, 그를 논란에 휩싸이게 했던 ‘줄’의 정체를 파헤치리라. 내 이질적 감각을 사회적 담론 안에 배치하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했다.
줄, 그러니까 소녀에 대한 양가적 시선은 근대 이후 성별과 연령규범에 의해 이중으로 타자화된 소녀(성)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다루기 쉬운 유연한 자원이자 상품으로 부상하는 맥락에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성적 코드가 가미된 소녀 이미지가 복잡하고 섬세한 메커니즘을 거쳐 생산·유통된다. 여기서 ‘순수함’이라는 기존 관념은 소녀 섹슈얼리티의 취약성을 부각해 성적 매력으로 작용하게끔 하면서도, 성적 이미지를 중화하며 ‘삼촌팬’으로 대표되는 남성 소비자의 도덕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소비한 게 아니라는. 아이유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CHAT-SHIRE》 앨범은 이 아이러니를 폭로한다. 소녀 스타로서 ‘아이’(무성적 존재)와 ‘여자’(성적 존재) 사이를 아슬하게 넘나들길 요구받던 아이유는 ‘섹시한 아이’(성적 요소+무성적 요소)의 이미지를 통해 그 경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뮤직비디오에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아이유.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아이유는 온전한 대상도, 주체도 될 수 없는 모순적 존재다. 자신이 보이는 방식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 앨범을 둘러싼 논란은 곡예의 후유증이다. 기존 규범을 교란했기에 주어지는.
길었던 덕질의 여정이 끝났다. 그는 이후에도 또 다른 방식을 거듭하며 대중문화 시장에서 살아남았고, 혼란했던 시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 같다. 나 또한 그에게 매료됐던 시간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간다. 다만 이 모든 소화 과정이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는 현실만은 선명하다. 스쿨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2018년, SNS에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는 문장이 떠돌았다. 한편으로 “어린 여자아이들”이 미래에 다른 무엇으로 변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서 폭력에 저항하는 힘을 가질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스쿨미투 운동이야말로 그런 힘이 아니던가. 여성 일반으로 다 묶일 수 없는 소녀에 대한 사유가 여성주의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김소이 pionasoy@daum.net
자신의 경험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개별적 사실에서 보편적 진실을 발견해내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인생 전반기를 다룬 첫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보여준 전략이 그랬다. 하와이 출신 백인 어머니와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를 두고 아시아에서 태어난 자신의 ‘복합적 정체성’(개별)이 ‘미국의 역사’(보편)를 담고 있다는 게 오바마의 통찰이었다.
5회차 ‘미지의 소리’ 선정작을 쓴 김소이씨도 자신의 경험을 톺아보면서 보편적 진실을 좇고 있다. “한국에서 소녀로 산다는 건 아슬한 줄타기와 같다”는 문장은 그가 행한 성찰의 결과다.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자신의 경험에서 ‘이중으로 타자화된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준다. ‘사람 자체가 장르’라고도 불리는 가수 아이유에게 빠져 그의 미니앨범 4집 《CHAT-SHIRE》를 파고들다가 생긴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덕질한 만큼 깨달은 셈이다.
‘덕질’은 엠제트(MZ)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매력적인 대상이 풍기는 강력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동경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경’하고픈 모든 사람, 모든 세대의 공통된 라이프스타일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오래된 행위 패턴인데, MZ세대의 그것이 다르게 보이는 건 ‘덕질’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덕후’는 신라시대 공주 이름 같지 않은가.
수영복이 좋아서 수영복을 30개 넘게 사들인 끝에 수영복을 홍보하는 인플루언서까지 됐지만, 결국 진짜 좋아하는 수영복은 입지 못하는 이야기를 쓴 김진주씨의 글은 ‘덕질의 역설’을 통쾌하게 보여줬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전제할 때 덕질이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야구 이야기로 풀어낸 신지윤씨의 글도 눈길을 끌었다. 덕질의 진정한 의미는 장자가 말한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함의 가치’, 즉 덕질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 문선재씨의 글에서는 남다른 통찰을 볼 수 있었다.
김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미지의 소리: MZ는 어떻다, 뭐가 다르다… 이런 구구절절한 제삼자의 평가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MZ 당사자가 말하는 MZ. 4주마다 글을 공모해 심사 뒤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