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는 다시 너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21×한겨레교육 공동기획]
충만했던 사랑의 추억, 이젠 이별해도 괜찮다
등록 2025-03-06 20:33 수정 2025-03-09 17:43

미지의 소리 다음 원고를 모집합니다.

다음 주제: 내 복제인간이 생긴다면

분량: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2025년 4월27일 밤12시

발표: 제1562호

문의·접수: leejw@hanien.co.kr

※ 응모시 메일 제목은 [미지의소리_이름] 기재, 메일 본문에 [핸드폰번호]를 반드시 기재 부탁드립니다.

※ 원고료: 당선작 1편 10만원, 한겨레교육 마일리지 10만 점

※ 마일리지는 한겨레교육 전 강의 대상 적용 가능합니다.

※ 마일리지 사용기한: 적립일로부터 한 달 내

스칸디나비아의 오로라. 게티이미지뱅크

스칸디나비아의 오로라. 게티이미지뱅크


광주광역시에서 인천공항까지 심야버스로 4시간, 인천에서 독일 뮌헨까지 13시간, 그리고 다시 뮌헨에서 핀란드 헬싱키까지 2시간30분. 탐페레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었던 시간들, 그곳에서 북쪽으로 위치한 네시예르비. 핀란드에서 16번째로 큰 호수. 사람들이 한겨울에도 야외 사우나를 즐기며 들어갔다 나오곤 하는 호수.

밤중에 휴대전화 라이트만을 의지하며 숲길을 헤치고 나아갔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무엇이라도 튀어나올까 많이 무서웠다. 늦게까지 과제를 해야 했다. 미리 가서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도착한 곳에는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마시멜로를 굽던 독일인들,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랑 얼굴이 닮아 헷갈렸던 스웨덴 사람. 내 한국 친구들. 홍콩 친구들.

숲길 옆에는 바다에서나 볼 법한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곳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호수 너머로 출렁이는 빛무리를 봤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또 선명해지곤 했던 면사포 같은 무언가. 녹색이기도, 남색이기도, 자줏빛이기도 했던…. 와~ 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이리저리 설정을 만져 신중하게 찍으면 선명하게 담겼던 오로라. 노던라이트.

 

잊을 수 없이 벅찼던 오로라보다 더

너는 나에게 참새 이야기를 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봄이던가, 쌀쌀했던 기억이 난다. 이어폰으로 바꿔 듣는 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이 시려도 꾹 참으며 전화 너머 술에 취한 네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어릴 적 조그마한 새끼 참새를 손안에 품고 콩닥콩닥 뛰던 것을 느꼈던 그 감각만큼, 어른이 되어 참새구이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만큼, 먹어봐 먹어봐~ 하며 주변인들에게 강요받았던 그 괴로움만큼,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던 너의 말.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이거 사실 소설에서 읽은 거야~ 하고 헤헤 웃던 그 목소리.

나는 그래서 너한테 오로라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삶이 희미해져가던 나에게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는 벅참이었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내가, 몇 년 만에 느낀 행복이었다. 그런 오로라를 보지 않았어도 될 만큼 널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힝 하고 울던 내 기억 속 너의 모습.

영원한 건 없다고 믿는 나와 달리, 너는 그렇지 않은 사랑을 보여줬다. 그래서 회의와 냉소에 익숙해져 있던 나를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었다. 네가 일하던 카페와, 같이 땀 흘리며 올랐던 하늘공원과, 오리배를 탔던 한강, 보이면 으레 들어가 한 권씩 골라 사고는 했던 책방, 한가득 짐을 들고 날 보러왔던 버스 터미널, 같이 거닐던 네 고향 호수 길, 어색했던 내 모습이 점차 익숙해지게 된 네 컷의 사진들, 어설프게 잼 발라 고깔모자 곰돌이 접시에 담아놓은 토스트, 네가 좋아하던 김치볶음밥, 혼자 자기 싫다며 일 끝나면 지하철 출입구에서 타박타박 올라오던 네 모습.

나는 너에게 사랑을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일에 비유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이곳에 있는 것을 다 챙기고 뛰어들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막상 도착하고 나면 그곳에 있는 것과 두고 온 것을 비교하며 후회할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대도 너에게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편지를 썼다.

 

다시 돌아가도 네게 말할 거야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게 되기 전인 그날, 너에게 잊히는 건 싫다는 나의 말에, 너는 왼쪽 볼을 따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닦아줄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고 떠나는 너의 뒷모습에, 나는 너를 붙잡지 못했다. 네가 여러 밤 내게 오던 그 길을 따라 집에 돌아가는데, 숨이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숨이 컥컥 막히고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많이 지났다. 많이 힘들었다. 너는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너를 내 곁에 둘 수 있었을까, 시간을 수백 번, 수천 번도 돌려본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돌리면서 집 앞 하천 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면, 슬리퍼에 발등이 까져나가 피가 나고 나서야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되고는 했다.

어느 순간 그럴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사랑했고, 그렇기에 이별했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너무도 많은 눈물과 상처가 있었지만, 이제는 널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너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안부도 궁금하지 않다. 어디선가 따뜻한 밥도 잘 먹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도 받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순간으로 돌아가, 너에게 오로라에 대해 말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다시 한번 너에게 고백한 그 장소로 돌아가, 너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말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 우리가 끝나게 된 그 말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다시 한번 너와 헤어지고, 이 아픔을 또 겪을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나는 다시 너를 보지 않을 것이다.

황다훈 ghkdekgns@g.skku.edu

 

 

선정하며—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1961년생 버락 오바마가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것은 2009년, 그의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나이가 걱정됐던지 한 노인 유권자가 타운홀 미팅에서 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매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40대의 나이가 너무 적은 것 아닌가요?” 오바마가 되물었다. “질문하신 선생님은 요즘 항상 현명한 판단만 하시나요?”

인생 경험의 총량이 현명함의 수준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인생 경험의 총량은 두 배가 될 테다. 현명함도 두 배 이상 늘어날까. 비슷한 상황을 설정한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면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들이 대체로 같은 수준의 실수를 반복하거나,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는 걸로 그려진다. 그것은 아마도 성공과 성취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실패와 실수로 점철된 일상이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 아닐까.

결국 과거를 보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실수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 말이다. 요컨대 과거를 긍정하는 태도가 현재를 긍정하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작가 유시민이 쓴 ‘청춘의 독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여러 고전을 대하는 ‘20대의 유시민’과 ‘현재의 유시민’을 스스로 냉정하게 비교하는 대목이었다. 20대의 시선과 현재의 시선은 연결되지만, 현재의 시선으로 20대의 자신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유지할 수 있는 태도다.

12회차 ‘미지의 소리’ 선정작을 쓴 황다훈씨는 사랑과 헤어짐의 경험을 통해 과거를 냉정하게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일”처럼 사랑에 뛰어들었지만, 이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랑과 이별이 주는 눈물과 상처를 긍정하면서 과거를 후회와 회한의 시선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김창석 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