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통 주홍빛이던 손톱에 점차 무늬가 생긴다. 손톱을 깎을 때마다 보름달이 초승달이 되듯 물든 부분이 기울고 물들지 않은 부분이 차오른다. 이렇게 바뀌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기특한 마음이 솟는다. 애쓰지 않아도 몸은 부지런히 필요한 일을 해내는구나 싶어서.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기특한 조각들을 그동안 나는 참 아무렇지 않게 버렸구나. 매일 쉬지 않고 제 역할을 했지만 결국 어느 순간 쓰레기가 되어 버려진 내 몸의 일부였던 파편들. 그래서 초승달 모양으로 깎여나간 발그레한 손톱 조각들이 괜스레 안쓰러워졌다. 무심코 지나치고 무신경하게 버렸던 것들이 떠올라 조금 울적해졌다.
물든 손톱에는 엄마와 처음으로 봉숭아 물을 들이던 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쨍한 햇볕에 한껏 붉어진 봉숭아 꽃잎들을 똑똑 따고, 거기서 단물을 들이켜던 개미들이 무사히 빠져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백반과 소금을 섞어 야무지게 짓이긴 꽃잎을 내 손톱 위에 조심조심 올리고, 랩을 조각조각 잘라 손톱 주변을 감싼 후 실로 묶어주던 엄마의 손길. 손톱이 싸하게 시원해지는 것을 신기해하는 와중 귓가에 울리는 엄마의 당부. 혹시 아프면 손톱 색도 확인해야 하니 새끼손톱 하나는 물들이지 않고 비워둬야 한단다. 하룻밤이 지나면 아홉 손가락 끝이 온통 불타오르니, 전날 내 손가락들을 동여매던 엄마의 등 너머에서 저물어가던 석양 빛깔과 닮았다.
쉼 없이 자라는 손톱들처럼 나도 성장해 한 사람 몫을 해내느라 저 기억을 잊고 지냈다. 여름을 거듭할수록 손톱이 붉어지는 일은 드물어졌고 봉숭아가 꽃을 피우고 씨를 뿌릴 수 있는 땅도 사라졌다. 햇볕 냄새와 흙의 감촉, 습기의 온도를 살갗으로 체감하며 여름을 보내던 어린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아스라이 멀어졌다.
해야 할 일을 무사히 해치우기 위해 제공되는 에어컨 바람을 맞고서야 여름이라는 계절감을 실감하는 어른이 돼버렸을 때, 부쩍 뜨거워진 온도와 스콜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상기하는 것이라곤 꿉꿉해질 빨래와 다음달 전기요금에 대한 걱정이 전부였다. 기후위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 혹은 급격히 바뀐 날씨에 터전을 잃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에어컨이 앗아간 습기만큼 메말라버린 자신을 자각했던 어느 날 아침, 그래서 나는 도시를 등지고 시골로 내려갔다.
불그스름한 손톱 조각들에서 내가 나를 소모하던 그날들이 읽힌다. 뭘 해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고, 어떻게 해도 못난 결과 앞에서 지난했던 과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러니 내가 늘 모자란 사람으로만 느꼈던 시간 말이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 눈앞의 현실을 채워내기에 급급해 주변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헤아리지 못했다. 때가 되면 깎여서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버려질 존재인 것만 같아서 쓸쓸하고 외로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깎은 손톱을 쓰레기통에 버리듯 스스로 만든 고립과 소외 속에 나를 제법 오래 방치했다.
그럼에도 몸은 묵묵히 살아낸다. 살뜰히 챙기거나 보살피지 않아도 손톱은 자란다. 어느덧 자라나 깎아야 할 때가 된 손톱은 도리어 누가 봐주지 않아도 온전히 제 할 일을 해낸, 그러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순간들을 증명한다. 괴로웠던 지난날들 속의 나 또한 단지 쉽게 대체되거나 폐기되는 소모품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있어야 할 곳에서 필요한 일을 했던 하나의 존재였을 테다. 다만 조금 사소해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을 매일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면 그 사소함이 미약하게나마 존재감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봉숭아는 내게 그저 여름이면 길가에 흔한 꽃이 아니다. 엄마가 손톱에 주홍빛으로 새겨준 여름이 곧 봉숭아다. 그렇게 봉숭아는 내 안에서 그만의 무게를 갖고 존재한다. 미미하고 하찮더라도 괜찮다. 매일 내가 눈길을 준다면, 오늘도 봉숭아 물들인 손톱이 새 손톱에 제 자리를 내어주며 깎여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내가 알아챈다면. 어쩌면 그걸로 족한지도 모르겠다.
수자타 bloodvessell@gmail.com
선정하며―내가 매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과 그 이유
“눈 감고 찍은 사진/ 장난스런 표정/ 하나 둘 셋 하고서/ 손가락 하트/ 둘이서 연습했던/ 시그니처 포즈/ 꽃받침 속 너와 나/ 빛나고 있어”
아티스트 ‘21학번’이 부른 ‘스티커 사진’의 가사는 엠제트(MZ) 세대의 ‘셀프사진관’ 사랑을 오롯이 보여준다. 셀프사진관이 온 나라에 얼마나 많은지 궁금해 기사를 검색해보니 50여 개 브랜드에 3천 곳이 넘는단다. 시장을 주도하는 브랜드인 ‘인생네컷’의 2023년 연간 이용자만 2240만 명. 또 다른 상위 브랜드 이름이 ‘포토이즘’인 걸 보면 사진찍기는 놀이문화를 넘어 이데올로기로 격상된 느낌이다.
맛있는 음식, 유니크한 공간, 공들여 만든 몸매에 대한 MZ세대의 ‘인증 강박’은 종종 실속 없는 허영과 과시로 비난받는다. 그러나 ‘내 마음에 쏙 드는 지금 여기 나’에 대한 기록은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자기 존재 증명이다. 기성세대라고 다를까. 그들이 국외로 나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클리셰 아닌가. MZ세대는 그걸 매일 하는 것뿐이다.
‘미지의 소리’ 6회차 선정작은 수자타씨가 쓴 글이다. 그가 매일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은 장면은 여름이면 엄마가 봉숭아로 물들여줬던 자신의 손톱이다. 봉숭아 물이 든 손톱을 잘라야만 하는 순간을 아는가. 그때의 안타까움과 울적함은 봉숭아 물을 들여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어른이 되고 도시에 나가 매일매일 자신을 소모하면서 살아내야 했던 그는 문득 자신의 모습에서 잘려나간 손톱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무작정 시골로 내려간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처럼 햇볕의 냄새를 맡고, 흙의 감촉을 느끼고, 습기의 온도를 살갗으로 체감하기 위해서였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연상되는 이 글은 “사소해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쉽게 대체되거나 폐기되는 소모품이 아닌” “그림자처럼 있어야 할 곳에서 필요한 일을 했던” 우리 모두의 평범한 인생에 바치는 비범한 헌사다.
김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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