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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닐 거다”… 성폭행범 연민한 재판관

중증 지적장애인 성폭행한 미성년자 재판에서 판사의 2차 가해, 인권위 “판사의 언행은 인권침해” 결정문에도 법원은 인정조차 하지 않아
등록 2023-11-03 10:34 수정 2023-11-18 01:32
그림1. 인권위 결정문 일부. 피해자 언니(진정인)가 판사에게 들었다는 말들이 적혀 있다.

그림1. 인권위 결정문 일부. 피해자 언니(진정인)가 판사에게 들었다는 말들이 적혀 있다.

H씨의 동생은 20대 중증 지적장애인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동생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정아무개(2021년 사건 당시 16살)를 알았고, 그의 요구에 마지못해 신체 사진을 보내고 직접 만나기로 했다. 이후 동생은 공원 화장실에서 피투성이 모습으로 발견된다. 정씨는 피해자를 성폭행하며 수술이 필요한 심각한 상처를 입힌 뒤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도주했다. 정씨는 체포 직후 혐의를 부인하다 여러 물증 앞에 범행을 시인했고, 강간치상으로 기소돼 대구지법에서 재판받게 됐다.

그리 특별한 경우 아냐… 지적장애인은 일반인처럼 인지 못해…

동생은 사건 이후 ‘여자로 보이기 싫다’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차례 자해·자살 시도를 하다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등 일상이 무너졌다. H씨를 비롯한 가족의 삶 역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래도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피해자와 가족은 사법시스템이 가해자인 정씨의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내릴 것이라 기대했다. H씨는 동생에게 가해자를 꼭 감옥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야 동생이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법정에서 H씨는 큰 충격을 받는다.

“(피고인이) 정말 질이 나쁜 애는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나쁜 학생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는 지적장애인이니까 일반인처럼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 특별한 경우도 아니다.”(나머지 발언은 위 ‘그림’ 참조) 이상오 판사는 엄벌 의사를 전하려는 H씨를 제지하면서 이런 말을 이어갔다. 지적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를 기반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보다 미성년자 피고인과 그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발언이 판사 입에서 나왔다.

“피고인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생의 일상 회복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냐? 돈 받아서 동생이 좋아하는 거 할 수 있게 해주면 좋지 않겠냐.” 합의 거부 의사를 밝힌 H씨를 앞에 두고 판사는 계속 합의를 종용했다. 피해자들은 금전 합의가 주변 상황 등에 몰려서 하는 강요된 선택지이며, 합의할 경우 오히려 ‘돈을 노린 게 아니냐’는 주변 시선에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가해자가 본인이 저지른 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는 게 피해 회복의 시작이라고도 말한다.

판사는 “피고인은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 이해해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피해자도 살아갈 날이 많은 20대 청년이다. 동생의 고통을 같이 겪던 가족은 합의 제안을 따르지 않았고, 이 판사는 선고 당일 합의를 거부한 H씨 쪽에 보란 듯이 정씨에게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렸다. 정씨와 같이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소년’(만 14~19살)이라도 재판부가 소년부로 송치하면 소년보호재판(가정법원)을 받아 전과가 남지 않는다. 검찰에서 기소한 소년범의 40%는 이렇게 소년부로 보내져 처벌받지 않고 있다(성폭력 사범도 유사).

가해자 ‘성 지식 부족’, 피해자 ‘성적 자기결정권 가능성’

이례적으로 검찰이 항고·재항고했으나 대구고법과 대법원은 기각했다. H씨는 소년보호재판을 방청하러 대구가정법원을 찾아갔으나, 피해자 쪽이 배제되는 소년보호재판 특성상 방청은커녕 결과조차 통보받지 못했다. 정씨에게 ‘10호 처분’(최장 2년간 소년원 송치)이 내려졌다는 사실도 겨우 알아냈다. H씨는 대법원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넣고, 탄원서를 모으며 이 사건을 알리려 분투했다. 그러나 2022년 8월 대법원은 “소송지휘권의 범위를 벗어난 재판 진행이나 부적절한 언행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회신했다. 같은 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 사건이 다뤄졌지만 대구고법원장은 형식적 답변만 했을 뿐이다.

2023년 10월, H씨에게서 8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그와 가족을 고통에 빠뜨렸던 판사의 언행이 인권침해라는 인권위의 결정문이 도착했다면서. 또한 인권위는 “피진정인(판사)은 진정인(H씨)과 피해자 측이 자신의 발언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사정을 재판 결과(소년부 송치 결정)에 반영되도록 하는 매우 부당한 처사를 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2023년 2월 대구에서 만났던 H씨 얼굴이 스쳐갔다. “그날 법정에서 판사가 보인 모습은 그 공기마저 상처였어요.” H씨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으로 진술권을 요청했을 때 “변호사를 통해서 하라”며 거부하던 판사의 모습을 기억한다. 자신을 ‘귀찮은 피해자 가족’으로 취급하던 판사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자기 인생을 걸어 동생을 살려낸 일을 후회할 것 같다고 토로한다.

이 판사는 2020년 신설된 의제강간연령 상한(16살)과 관련해 2022년 12월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재판부를 이끌기도 했다. 사건 당시 16살이던 정씨에 대해서는 ‘성에 대한 지식 부족’ 등을 운운하던 이 판사가, 같은 나이의 성착취 피해자에 대해서는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가능성’을 들어 해당 법조항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같은 청소년이라도 피해자에게는 책임을 묻고 가해자에게는 기회를 부여하는 셈이다.

다른 2차 가해자와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

이 판사는 법원에서 만나는 수많은 2차 가해자 중 한 명이지만, 직업 법관이라는 면에서 언행의 영향력은 다른 2차 가해자들과 비교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부적절한 언행을 한 판사들에 대해 법원이 ‘재량’ ‘소송지휘권’ 등을 내세우며 그런 언행이 부적절하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인권위 결정이 나왔음에도 대법원은 해당 법관의 소속 법원에 통보해 처리하라고 했을 뿐 인권위 권고(피진정인에게 인권교육을 하고, 법관의 법정 언행과 관련한 인권침해 예방과 재발 방지 방안 마련)를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H씨는 싸움을 이어가기로 했다. 가해자와 그 부모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한 것이다. 법정에 들어서는 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다시 싸움을 시작한 그에게 법원은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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