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 옥수수 수확을 마치고 배추를 심는다고 했을 때, 시어머니가 몇 포기나 심을지 물으셨다. “서른 포기요” 했더니 어머니가 “아이고, 그걸 누구 코에 붙여. 그래도 한 오십 포기는 심어야지. 심는다고 다 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넉넉하게 심어야지” 하셨다. 포기 수는 결국 모종가게에서 정해줬다. 70포트짜리 모종을 한 판 단위로만 팔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간에서 배추 심는 시기보다 2주 늦은 8월26일에 배추 모종 70개와 무 씨앗을 심었다. 2주 뒤에 가보니, 큰 것은 내 손바닥만 하게 제법 배추 모양이 돼 있었다. 70개 중 10% 정도는 말라 죽었는지 사라졌다. 경기도 고양에서 주말농사를 하는 친구는 모종 심고 일주일 만에 다 녹아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리는 선방했네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벌레가 먹어 구멍이 송송 나 있다. 종묘사에 가서 벌레약을 사다 쳐주고 복합비료도 한 숟갈씩 줬다.
밤이 되자 인근에서 쿠어어어 쿠르릉 쾅쾅 하는 괴성에 번쩍번쩍 사이키 조명이 점멸했다. 무슨 ‘쥬라기 공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야 했더니 아랫집 B언니 말로는 J씨네 배추밭에 고라니 쫓으려 켜둔 거라고 했다. “처음 저 소리 났을 때는 우리 집 개가 얼마나 짖었는지. 며칠 지나니까 이젠 안 짖어.” 밝을 때 본 바로는 그 집은 여름 수확을 마치고 밭 가운데 덩그러니 자기들 김장할 만큼만 심어뒀던데. 난데없는 공룡 소리에 전전반측하며 이건 김장 이기주의라고 해야 하나 생각했다.
추석 연휴에 밭에 갔을 때 배추는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큰 것은 남편 손바닥만큼 자랐고, 벌레가 잡혔는지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한 서른 포기 수확하겠네.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았어. 요소 비료를 한 숟갈씩 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주말, 배추는 비실비실한 거 포함해 딱 열 포기 남아 있었다. 남편이 “이거 아무래도 고라니 짓 같은데? 말라 죽었으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너무 깨끗하게 없어.” 쥬라기 배추밭에 입장 못한 고라니들이 만만한 우리 밭으로 몰려온 걸까.
올해 배추 심고 진부에서 김장까지 해버릴까봐 하며 김칫국을 마셨더니 친구가 아끼는 항아리를 기증까지 했는데…. 배추 모종 사려고 허둥댔던 일, 냄새나는 퇴비 자루를 품에 안아 옮겨 괭이로 일일이 폈던 것, 비닐 멀칭 하느라 애쓴 것까지 지난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역시 배추를 지키려면 공룡 몇 마리쯤 필요한 거였나보다.
배추밭을 망치는 건 고라니뿐이 아니다. 우리 밭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배추밭이 수확하다 절반 이상 남은 배추를 내버려뒀는데, 아침에 보니 한 승용차가 트렁크를 열어두고 이삭줍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저 배추들 다 버리는 거 같으니 이따가 가보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추밭에 가봤다. 무름병이 났는지 배추 밑동이 누렇게 상해 있었다. 커다란 배추통을 들고 겉잎을 떼어내니 그냥 뚝뚝 떨어져 나간다. 얼마나 속이 상할까 싶었다.
버려둔 배추 중엔 알맹이가 멀쩡한 것도 더러 있었다. 고르고 골라 세 포기를 차에 실었다. 그날 저녁, 배추쌈에 배춧국을 끓여 먹었다. 다음날엔 잔새우를 넣고 배추볶음을 했다. 내가 늦은 어느 저녁엔 남편이 베란다에 부려둔 배추를 찾아 씻어 쌈 싸먹고 있더라. 남편이 자기 평생에 이렇게 열심히 배추를 먹은 게 처음인 거 같단다. 요새 배추 가격이 20% 올랐다던데, 주운 배추가 맛있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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