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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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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궤도’

등록 2023-10-13 22:49 수정 2023-10-18 10:01
<데블스 플랜> 출연자들이 전략을 짜고 있다. 위 오른쪽이 궤도. 넷플릭스 제공

<데블스 플랜> 출연자들이 전략을 짜고 있다. 위 오른쪽이 궤도.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데블스 플랜>은 tvN <더 지니어스> 시리즈처럼 ‘지니어스’한 사람들이 외부와 분리된 공간에서 숙박하며 문제를 풀어 우승자를 가리는 ‘지능형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오전(메인 매치)에는 서로 경쟁하는 게임을 하고, 오후(상금 매치)에는 서로 협동해 상금 규모를 올리는 게임을 하도록 해서, 속이다가 믿어야 하는 감정과 관계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합니다. 문제를 풀면 그만인데, 숙소까지 제공하는 것은 참여자들이 승리를 위해 합종연횡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겠지요.

자연스럽게 시리즈물은 과밀한 스트레스 공간에 넣어진 인간실험실 분위기를 냅니다. 이런 공간을 그릴 때 강조되곤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본능이란 말은 ‘생존 욕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살아남으려 계략을 짜고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거짓말합니다. 프로그램은 시작에서 그런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데블스 플랜>은 당신의 인성과 인생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폭력이나 절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게임이 허용하는 어떠한 계획도 가능합니다. 오직 승리를 위해서만 플레이하십시오.” 승자에게 돈과 비슷한 ‘피스’를 주는데, 피스가 떨어지면 탈락합니다. 탈락 전에도 피스가 적으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위계적이고 자본주의적으로 게임을 짜놓았습니다. 게임은 결과가 모두 똑같으면 피스를 잃도록 구성돼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상한 전략가가 등장합니다. 유튜브 <안될과학> 진행자 ‘궤도’는 ‘최대 다수의 생존’ 전략을 처음부터 내세웁니다. 피스가 한 개뿐이라 탈락 위기에 놓인 사람을 ‘다수 연합’으로 구해내고, 자기 피스를 잃는 희생정신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피스가 적은 다수’라는 반대편에는 ‘피스가 많은 소수’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상대편을 향해 ‘다수의 폭정’이라며 불만을 표합니다. 궤도의 “그냥 놔둬서 0점을 만들 수는 없잖아”라는 말은, ‘실력=서바이벌’이라는 게임의 근본 질서를 흔드는 말이 됩니다. 다수파 내부에서 이의가 제기되자, 소수파 중 누군가는 “복지 모델의 실패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시청자는 ‘궤도는 공산주의자’라는 말도 합니다.

진화 혹은 생존 전략에는 경쟁도 있지만 협동도 있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저자는 호모사피엔스가 지능적·신체적으로 우월한 비슷한 종을 넘어 살아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 협력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뻔해 보이지만, 저자는 인생의 성공은 얼마나 이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친구로 뒀느냐에 있다고 말합니다.

책은 스탈린 체제하에서 유전학자가 재판 없이 처형됐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생물학의 ‘적자생존 법칙’이 공산당 정치 노선을 거스르는 것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과학도 재조직됐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완전히 그와 반대되는 사회입니다. 경쟁만이 인간의 본성이라 강조하죠. 그렇지 못하면 ‘순진하다’는 말을 들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데블스 플랜>에서도 제1의 법칙은 실력이나 운이 아닌 ‘신뢰’였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체제에서 이상한 궤도를 발견하는 일은 ‘다정한’ 일입니다.

구둘래 편집장 anyone@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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