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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냥…이주노동 30년, 명동성당 농성 20년이 지나도

등록 2023-06-30 21:34 수정 2023-07-07 10:14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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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제도가 도입된 지 30년이 됐습니다. 우리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2003년 11월부터 1년 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했습니다. 2005년에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이 설립됐습니다. 정부는 이주노조를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2015년 대법원은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주노동자 활동이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의 힘 있는 목소리가 국회에 울려퍼졌다. 2023년 6월23일 <곁을 만드는 사람>(오월의봄 펴냄) 책 콘서트에서였다. 한국 사회의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낸 이주활동가와 기록노동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투쟁했기에 다시 꿈꿀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의 역사가 시작된 지도 30년이 넘었다. 1993년 산업연수제도가 도입됐다. 여권압류, 임금체불, 폭언과 폭력, 장시간 강제노동을 피하려 연수생들은 사업장을 이탈했다. 정부는 산업연수제가 미등록 노동자를 양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2004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됐고 산업연수제는 2007년 폐지됐다.

고용허가제 실시 전 정부는 대대적인 미등록 노동자 단속과 추방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단속과 추방에 대한 공포로 이주노동자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간사냥’식 무차별 단속으로 많은 사람이 도망치다가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2003년 11월15일,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쟁취를 위한 농성투쟁단’이 서울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2004년 11월28일까지 380일 동안 농성이 이어졌다. 이후 2005년 이주노조가 설립됐고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다.

이주노동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이어졌다. 섹 알 마문 활동가는 명동성당 농성투쟁 20주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지금 다시 농성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못할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때는 어려서 농성에 참여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래도 잘했다’라는 자부심이 드는 때가 많아요. 지구상에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자기 권리를 주장해서 투쟁했고, 앞으로도 또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동성당 농성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이주활동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이 좋았습니다.”

30년 이주노동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2007년에는 전남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불이 나 이주노동자 10명이 사망했다. ‘보호’가 아닌 감금 시설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임금체불을 당해도 이주노동자는 비자가 만료되면 빈손으로 출국했다. 고용허가제로 정부가 알선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죽기도 했다. 정부가 승인한 기숙사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자다가 사망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주민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박희정 인권 기록 활동가는 말했다. “이주노동 운동 역사가 길잖아요. 그 안에서 많은 분이 꼭 필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만큼이나, 실리지 못한 이야기도 주목해봐야 합니다. 이 책에는 어렵게 어렵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록됐습니다. (…) 강제 단속을 당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 사람들의 슬픔을 깊이 생각하고요. 또 언젠가는 국가가 했던 폭력에 대해 사과하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춘희 <깻잎 투쟁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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