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홍(31)은 조선문학자 김태준(40)을 찾아갔다.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저술한 학자이자,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 강좌의 강사로 유명한 남성을 방문한 것이다. 한때 경성제국대학 총장에게서 교수 승진까지 내락받은 전도 양양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다소 이례적이었다. 젊은 여성이 면식만 좀 있을 뿐인 학계 인사를 불쑥 방문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적어놓은 김태준의 글이 있다.
“그때에 마침 박 동지의 거처를 찾는 여자 P동지가 있었다. 그는 나와 동일한 사건 때문에 투옥되어 있다가 나온 지 몇 날도 되지 않아서 나를 찾았다.”1
1944년 10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여자 P동지’란 곧 박진홍을 가리킨다. 그의 용무는 ‘박 동지의 거처’를 찾는 데 있었다. 박 동지란 박헌영을 뜻했다. 1930년대 말~1940년대 상반기에 활동한 사회주의 비밀결사 ‘경성콤무니스트그룹’(경성콤그룹)의 최상급 지도자 박헌영의 소재를 물으러 갔던 것이다. 그는 김태준이라면 연락 루트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박진홍은 왜 비밀스럽고 위험한 정보를 김태준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두 사람은 시국사범의 ‘공범’이었다. 동일한 사건 때문에 투옥됐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 김태준은 1941년 1월7일쯤 체포됐다. 세칭 ‘서대문서 사건’이라고도 하는,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의 피의자였다. 세 차례 걸친 경성콤그룹 검거 사건 가운데 제1차 사건이었다. 박진홍은 그해 11월께 ‘홍인의(洪仁義) 외 53인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경성콤그룹 제3차 검거 사건에 걸린 것이다.
1943~1944년에는 경성콤그룹 피고인 상당수가 출옥했다. 사법관의 눈에 죄질이 무겁지 않다고 비친 사람들이나,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을 해친 사람들을 내보냈다. 불기소, 기소유예, 병보석, 집행유예 등의 명목이었다. 만기 출옥자도 있었다.
박진홍이 출옥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음에 주목하자. 옥고에 시달린 몸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이었다. 그는 비밀결사운동에 다시 뛰어들 셈으로 은밀하게 조직선을 복구하려 나섰다. 놀라운 여성이었다. 이 점 하나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투철한 반일 혁명가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태준도 놀랐다고 한다. 정의를 위해 거침없이 헌신하는 박진홍의 태도에 대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얼굴이 붓고 다리가 부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치안유지법 4범의 경력을 가진 그는 아직도 투지가 왕성한 데 나는 놀랐다. 나는 그가 한 개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용감하게 싸워왔다는 데서 무한한 존경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접촉하는 동안에 그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질되었다.”2
얼굴과 다리가 퉁퉁 부어 있더란다. 오랜 감옥 생활에서 얻은 질환 탓이었다. 박진홍은 ‘치안유지법 4범의 경력’을 가진 투사였다. 투옥 횟수는 네 번에 이르렀고, 옥중에 갇힌 시기는 도합 10년간이었다.
출발점은 학생운동이었다. 박진홍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사회의식을 깨쳤다. 비밀독서회에 참여했고, 4학년 때 동맹휴교를 이끌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17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동덕여고보 개교 이래 제일가는 성적을 올린 수재로 손꼽혔다. 두뇌의 명석함이나 공부 재주가 학생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 때문에 그가 퇴학 처분을 받았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진심으로 애석해했다.3 하지만 이는 박진홍의 투쟁사 속에서 투옥 경력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첫 감옥살이는 노동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1932년 조선제사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해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꾀했다는 죄목이다. 두 번째 옥살이는 이재유그룹의 일원으로 비밀활동에 종사했다는 혐의였다. 1935년 1월에 체포돼, 1937년 5월에 출옥했다. 세 번째는 이관술그룹의 비밀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이다. 이때도 유죄형을 선고받고 1939년 중반까지 갇혀야 했다. 네 번째는 이미 말한 바 있는 경성콤그룹 제3차 검거 사건이다. 1941년 11월께 체포돼 1944년 10월 중에 출감했다.
김태준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토록 용기 있게 싸워온 것에 내면의 경의를 느꼈다.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됐다.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느낀 놀라움과 존경심은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몇 차례 접촉을 거듭하는 중에 그 감정은 더욱 깊어갔다.
김태준의 가족은 수년 전 그가 형무소에 갇혔을 때 그만 파괴되고 말았다. 노모와 아내, 어린 젖먹이를 차례로 잃었다. 일본제국주의는 그에게 민족과 민중의 원수일 뿐 아니라 가족의 원수였다. 출옥 뒤 김태준은 ‘굳센 복수의 염’에 불탔다고 한다. 그에게 남은 식구로 스무 살이 넘은 두 딸이 있었는데, 다행히 좋은 혼처를 구해 출가시켰다.
박진홍은 김태준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흔쾌히 호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진홍의 내면 감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황상 판단하건대 그렇다. 그는 김태준의 안전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그 남자가 체포될 위기에 처했음을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이 박진홍이었다. 그는 창덕궁 서편 금호문 밖 원동 158번지 김태준 집을 찾아갔다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경기도경찰부 형사들이 잠복해 있음을 알아냈다. 비밀활동 경험이 풍부한 박진홍은 무사히 현장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남자의 도피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기 집에 숨어 있도록 조치했다.
박진홍의 내면 감정은 국외로 함께 탈출하자는 남자의 제안을 쾌히 승낙한 데서 잘 나타난다. 당시 정황을 김태준의 기록으로 알아보자.
“나는 P에게 연안(延安) 가기로 결의한 것을 말했고, 그의 동행을 요청하였다. P는 쾌락하였다. 여기서 나와 P의 결혼식 없는 부부 생활이 지하에서 출발되었다.”
중국공산당 통치 지구인 연안으로 가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두 번의 국경을 넘고 전쟁터를 통과해야만 하는 위험한 여행이었다. 김태준이 비밀결사 ‘공산주의자협의회’ 사람들과 함께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이, 서, 김Y, 김C, 김T’ 등과 함께 활동했다고 썼는데, 해방 뒤 간행된 기록과 대조해보면 그들의 실명을 일부 알 수 있다. 각각 이정윤(48), 서중석(41), 김일수(49), 김C, 김T였다. 그 외에도 서완석(39), 정창섭(40) 등이 가담했다.4
이들은 일제의 패전이 다가온다고 예견했다.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방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두 김씨(김일수와 또 한 사람의 김씨)를 소련으로, 김태준을 중국 연안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박진홍은 이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나눠 맡기로 동의했다. 목숨을 함께 나누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랑하는 홀어머니와의 이별을 각오해야 했다. 그 남자의 구애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승낙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이 뜨겁고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그들은 결혼식 없는 부부 생활을 했다.
박진홍의 신변이 위험하게 된 점도 그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김태준이 숨어 있는 동안 밀정이 두 차례나 박진홍 집을 다녀갔다. 위험신호였다. 또 사상범 전향 공작 기구인 보호관찰소에서 일하는 옛 동지 K가 찾아와서는 박진홍에게 구혼한 일이 있었다. 변절자의 구애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랬더니 보호관찰소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려왔다. 1941년 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 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될 수 있었다.5
두 사람은 먼 길을 떠날 준비에 착수했다. 국경을 넘으면 다음해 1월5일을 기해 단파 송전 장치로 국내 동지들에게 암호 연락을 하기로 약속됐다.6
장비 구입비와 여행 경비를 감당하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김태준은 집을 팔고, 책을 팔았다. 주택은 팔았으나 돈이 별로 남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동안 수집해온 고서 더미는 값이 꽤 나갔다. 2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목돈을 휴대하고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의주, 봉천, 천진 등지에서 분할 영수할 수 있게끔 조치했다.
두 사람은 따로 길을 떠났다. 국경 신의주역에 두 정거장 못 미치는 비현역 앞 김재병의 집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김재병은 경성콤그룹 사건 때 고문으로 옥사한 동지다. 그 누이동생이 박진홍과 가까운 친구였다. 박진홍은 그와 함께 기차 편으로 경성을 떠났다. 전통 혼례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김태준 차례였다. 그는 경찰의 수배 중이었다. 열차 안에서 승객과 소지품을 감시하는 경찰의 눈을 피하려면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는 의사로 변장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사위가 대학병원 조수였다. 11월27일 밤이었다. 김태준은 사위와 복장을 바꿔 입었다. 국방복에 국방모를 쓰고, 청진기와 약병이 든 가죽가방을 멨다. 대학 당국의 신의주 방면 출장명령서도 갖췄다.
김태준이 비현역 앞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김재병의 형과 동생, 누이동생과 부모님이 그를 반겼다. 그 사람들 속에 박진홍도 있었다. “그 눈에 반짝거리는 광채와 기쁨의 표정”을 가득 실은 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7 누구보다도 자기를 반겼음을 알 수 있었노라고, 김태준은 기록을 남겼다.
참고 문헌
1. 김태준, ‘연안행 (1)’, <문학> 1, 190쪽, 1946년 7월
2. 위와 같음
3. ‘동덕시대 박진홍, 우수한 성적’, <매일신보> 1937년 4월30일
4. ‘1948년 조선연감’ 조선통신사, 1947년 12월 인명록의 김일수·서중석·이정윤 항목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정책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2020) 146~164쪽
6. 김태준, ‘연안행 (3)’, <문학> 3, 100쪽, 1947년 4월
7. 김태준, ‘연안행 (1)’, <문학> 1, 195쪽, 1946년 7월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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