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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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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물로 흥분’ 글 파문까지…검경 성인지 수준 처참

검경 수사관 중 성평등의식 수준 미달하는 남성 20%, 몇 가지 사례로 쌓기 어려운 신뢰 한꺼번에 무너뜨리게 돼
등록 2023-05-19 13:24 수정 2023-05-24 05:37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 경찰 로고가 보인다.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 경찰 로고가 보인다. 연합뉴스

“준강× 고소건 ㅅㅅ녹음파일을 듣고/ 카촬 몰카 영상을 보는데 꼬릿꼬릿하다/ 이걸 보면서 발기되는 내 자신이 비참하다”

2023년 5월8일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오늘도 출근해서’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이다. 블라인드는 직장 인증을 해야 가입할 수 있는데, 이 게시물 작성자는 ‘경찰청’ 소속이었다. 이 글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언론 보도 등으로 알려지자, ‘경찰에 제출한 증거물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느냐’는 피해자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겪은 ‘2차 가해’ 경험을 떠올리며 분노하는 피해자들도 있었다. 게시물은 삭제됐으나 불안과 불신은 남았다.

불법촬영 및 유포 피해자 A는 경찰서에 갔을 때의 모멸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담당 수사관은 A를 독립된 장소로 안내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소장에 쓴 피해사실을 큰 소리로 읽었고, 주변 수사관들에게 증거물을 보여줬다. 준강간 피해자 B는 녹음파일을 들은 경찰관이 ‘좋아서 하는 것 같다’고 하자, 녹음파일을 수차례 재생하며 사건 당시 본인의 반응을 거듭 설명해야 했다. ‘야, 이거 정신없는 것 같냐’라며 피해자인 본인 앞에서 동료 수사관에게 녹음파일을 들어보라던 경찰이 가해자보다 더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운이 나쁘다’는 수사관에게 읍소가 통한다는 ‘후기’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수사관들의 처참한 성인지 실태를 보여준 사례는 더 있다. 2018년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공유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의 운영자 손정우는 체포됐지만, 유료회원들은 줄줄이 선처받았다. 당시 인터넷카페에 ‘별일 아니’라며, ‘남자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데 운이 나빠 걸린 것’이라던 수사관에게 읍소하는 전략으로 선처를 끌어냈다는 W2V 회원들의 ‘후기’ 글이 기억난다. 성폭력 사건 증거물을 성적으로 활용했다는 블라인드 게시물을 특정인의 ‘주작’(없는 사실을 꾸며 만듦)으로 치부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5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2023년 5월11일 국가인권위원회는 ‘형사소송법분야 법집행 공무원 성인지 조사 및 젠더폭력 관련 판례분석 실태조사 결과보고 및 정책토론회’에서 여성청소년과 소속 경찰 수사관 293명, 여성아동범죄부 소속 검사·수사관 167명 등 총 46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 전체의 남녀평등의식 평균은 일반인 평균보다 높았지만, 일반인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상자도 전체의 13.5%(남성 19.5%, 여성 3%)였다. 해당 조사에서 4대 폭력(가정폭력·스토킹, 성매매, 성폭력, 성희롱)에 대한 통념이 경찰과 검찰의 ‘2차 피해 수사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신념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검찰보다 4대 폭력에 대한 통념(특히 성매매·성폭력)에서 문제적 수준이 높았다. 모든 집단에서 대체로 남성이 여성보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기혼일수록, 직급이 올라갈수록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자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통념에 좌우되는 수사관

심층면접을 통해 ‘2차피해 수사행동’은 전문성이 부족한 수사관에게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문성이 부족한 수사관이 낮은 성인지 감수성을 가질 경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통념이나 편견을 피해자에게 그대로 노출시키는 무리한 수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통념에 좌우되는 수사관은 성폭력 피해자의 다양한 트라우마 반응 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소리 높여 압박하는 방식으로 조서 중심의 기계적인 인터뷰 방식을 고수하면서 피해자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고 했다.

디지털 증거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중요해지면서 관련 압수수색영장 청구만 2011년 10만8992건에서 2022년 39만6671건으로 늘었으나(법원행정처 통계), 증거물 관리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부족하다. ‘잘라내기’ 방식(영상물 원본 파일을 복제해 압수한 다음 원본 파일은 삭제) 등으로 디지털성범죄 증거물의 원본을 지우는 노력도 미미해졌고, 몰수·폐기 등을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블라인드 글처럼 증거물을 수사관 개인의 성적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삼지나 않으면 다행인 실정이다.

물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면서도 디지털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사관도 있다. 2022년 6월 <한국경찰학회보>에 실린 ‘디지털성착취물 수사관의 PTSD 실태조사 및 관리방안 연구’를 보면, 사이버폭력 전담수사팀 수사관(디지털성착취물 범죄 전담)의 88%가 PTSD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경찰청이 진행한 ‘과학수사관, 사이버수사관의 PTSD 실태조사와 대응방안 연구’(호남대 상담심리학 연구진)에서도 사이버폭력 수사관의 60.71%가 PTSD를, 69.6%가 대리외상을 경험했으며, 이는 일반 경찰관(33.3%)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결과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영상·사진 등을 모니터링해온 처지(반디지털성착취 활동가들 역시 PTSD 고위험군이다)에서 수사관이 겪는 PTSD가 얼마나 삶을 옥죄는지, 고통스러운지 안다. 그래서 더 수사기관 내부 문제를 제대로 돌아보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PTSD 고위험군, 내부 문제 제대로 돌아봐야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언제든 안심하고 수사기관에 가라고 피해자에게 말하고 싶다. 수사기관은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증거물은 철저히 관리되며, 수사관은 피해자에게 추가로 고통을 안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고 싶다. 신뢰란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기는 쉽다. 이제라도 수사기관 성인지 실태 파악을 기반으로 블라인드 익명글 같은 처참한 성인지 수준을 보이는 공무원을 관리, 감독, 교육해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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