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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미인도,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한·중·일 옛 그림 속 여성 재해석한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
등록 2023-05-19 07:20 수정 2023-05-26 04:20

정조 때 간행된 <오륜행실도>에는 잔혹한 삽화가 꽤 등장한다. 자기 귀를 자르는 여자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도 기쁘게 웃고 있다. 남편의 유해를 짊어진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팔이 잡혔다며 자기 팔을 도끼로 잘라낸다. 유재빈 홍익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그림 속 열녀들의 신체가 ‘폭력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독자에게 ‘관음적 시선’을 허용하는 이중의 굴레에 놓였다고 보았다. 열녀가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려 스스로 몸을 훼손하고도 웃는 건, 이 그림들이 당대가 바라던 이상적인 여성상을 재현한 까닭이다.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유미나 외 지음, 혜화1117 펴냄)는 11명의 미술사학자가 한·중·일의 옛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을 젠더 관점에서 풀이한 책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미인도의 소비층은 대개 남성 문인이었다. 이들은 군자로서 색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절제와 보고 즐기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열녀 등 교훈 삼을 만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을 감상했다.(유미나)

독서하는 조선 여성을 그린 그림으로는 <책 읽는 여인>이 유일했는데, 문인이자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의 작품이다. 독서하는 여인의 모습은 자못 숙연하고, 그 뒤엔 중국 상류층의 문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조선 문인들의 상상 속 우아한 중국 여성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연희) 17~19세기 일본의 ‘경직도’(농업과 잠업과 관련된 그림) 상당수는 ‘미인도’를 닮았다. 여인의 생산성을 강조한 이런 그림은 미인도가 받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이정은) 중국 옛 그림 속 여성은 정절녀, 효녀, 악녀 등 몇몇 유형으로만 그려진다. 그 결과 당대를 살아간 진짜 여성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유형적으로 분류하기 좋은 여성 정체성만 남게 되었다.(지민경)

책은 그 밖에도 꽃에 빗대 품평받은 명나라 말기 기녀들(유순영), 조선 여성의 글씨 쓰기(조인수),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젠더 지도 구축(서윤정), 남성의 자수(김수진) 등의 내용을 담았다. ‘남성적 외금강’ ‘여성적 내금강’이라 묘사하는 금강산에 대한 젠더화된 미인식(김소연), 일본에서 유입된 ‘소녀’라는 용어와 타자화 현상(김지혜)도 분석했다. 서구 회화를 젠더로 읽어내는 시도는 있었지만, 동아시아 미술을 젠더로 읽는 책은 몹시 드물었다. 도판이 상세한데다 내용도 충실해 오래 두고 볼 만하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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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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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식교양만화의 새 지평을 연 김태권 작가가 가상화폐 이야기에 도전했다. 코인 시장에서 발생하는 펌프와 덤프가 무엇인지, 일론 머스크와 존 맥아피 등 가상화폐를 쥐락펴락해온 인물들의 수법은 어땠는지, 한국의 일론 머스크라고 일컬었던 권도형이 뜨고 몰락하는 과정 등을 함께 그렸다. 복잡하고 어려운 가상화폐의 세계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푸틴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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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대통령 당선 이후 총리, 대통령 연임을 거듭해 24년째 장기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푸틴 정권을 가까이서 취재해온 영국 저널리스트 캐서린 벨턴이 현대 러시아사를 관통하며 푸틴과 그의 사람들을 소설처럼 묘사한다. 푸틴의 이너서클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같은 정보기관과 군대, 경찰 출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한다.

슬픔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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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말없이 그를 안아주고 싶다.” 시인이자 영화인인 유진목의 산문집. 베트남 하노이 여행을 글과 56컷의 필름 사진으로 기록해 묶었다.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의 보복성 고소에 긴 싸움을 하고, 분노를 잠재우려 멀리 떠나 회복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5천원

공상과학(SF), 스릴러, 만화,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전혜진이 쓴 꼿꼿한 단편선. 국가폭력이라는 비극을 환상의 세계로 그려낸다. 표제작 ‘바늘 끝에 사람이’는 7만2천㎞ 떨어진 우주에 궤도 엘리베이터를 짓는 사이보그 노동자 이야기. 전쟁의 광기와 폭력, 1980년대 광주, 현대사 속 제주의 비극을 다룬 이야기 등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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