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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을 구우며 생각한 ○○에 대하여

등록 2023-05-16 05:09 수정 2023-05-18 15:42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매일같이 베이글을 굽기 시작한 동료가 있다. 영화에서 허무와 냉소의 상징이던 베이글이 그에게는 다정과 환대의 징표가 됐다. 햇밀로 구운 베이글은 햇볕을 품은 듯 부드러운 갈색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작은 오븐으로 욕심껏 만들다 맞닿은 반죽에 구멍이 찌부러진 모양새는 공허가 들어설 수 없는 자태를 뽐냈다. 거기에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공수해온 스프레드와 알갱이째 먹는 후추를 곁들이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미식체험이 가능했다.

○○을 찾아라

2022년 늦가을, 기진맥진한 채 퇴근한 BIYN 동료들과 이 밀도 높고 동그란 빵을 두고 둘러앉았다. 작은 도서관을 없애고, 복지 예산을 삭감하며, 노동시간을 늘리는 시도를 보며 느껴지는 무력감과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서였다. 2014~2015년에 BIYN 멤버들이 주축이 돼 기획한 ‘공공 그라운드’라는 행사를 떠올렸다. 그때처럼 다시 ‘공공'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기본소득 논의가 가능한 토양이 공공성이라고 믿는 우리는 공공성에 대한 감각을 탐색하는 대화의 장을 열고 위기감에 맞서기로 했다.

한번은 회의 중 누군가 최근 나를 웃게 한 뉴스가 있는지 물었는데 답하기 어려웠다. 우리에게 결여된 공적인 기쁨은 무엇일까. ‘소확행’에만 몰두하도록 내몰리는 상황 속에서 정신 차리고 붙들 ‘공확행’(공적이고 확실한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이토록 불안하고 피곤하고 빈곤한데. 그럼에도 고립되지 않으려 기어이 모인 것 자체가 돌봄이구나. 기획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마감을 어긴 서로를 탓하고 싶을 때마다 사랑으로 빚은 베이글을 기억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년을 앞둔 어느 날, 그 빵은 ‘○○(공공) 베이글’이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동료는 제집의 작은 오븐으로 또 한 번 한계에 도전해, 냉동실이 보관을 허락하는 최대치인 40개 굽기에 성공했다. 그 개수에 맞춰 서울 연희동 보틀라운지에 사람을 모았다. ‘공공을 찾아라’라는 이름의 행사는 미국의 생태철학자이자 활동가인 조애나 메이시의 ‘재연결 워크숍’으로 문을 열었다. 그 후 공공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데 필요한 역량을 주제로 패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저항할 자유’를 화두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님은 이동하고 배우고 노동할 권리가 배제된 장애인의 시민권 쟁취를 위해 투쟁해온 역사를 소개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어디까지 인정하겠느냐고. 두 번째로 ‘추적단 불꽃’으로 활동해온 원은지 미디어플랫폼 ‘얼룩소’ 에디터님은 ‘대화할 용기’에 대해 말했다. 반(反)성착취 활동의 어려움상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나설 수밖에 없어 표정을 보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더 촘촘한 언어로 공공을 설득하는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끝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활동해온 생태전환마을내일협동조합 이혜림님이 산불 연기로 기관지를 다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모두가 고꾸라지는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피해자들이 만든 연대의 도미노를 본다고. 기대감을 갖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기대할 수 있는 역량’을 의식적으로 기르자고. 나무를 심듯 기대를 심자고.

느린 산책을 하며 공적 풍경을 발견하며

귀 기울이느라 허기진 사람들이 베이글을 나눠 먹는다. 든든히 먹어둬야 고심해서 준비한 산책로를 걸으며 공적 풍경을 발견할 터였다. 이날 행사가 열린 장소도 그 자체로 공적 장소였다. 장애인과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차별 없는 가게’. 동네 강아지들의 마을회관이자 누군가에겐 근처로 이사할 이유가 돼주는 곳. 작은 지도와 깃발을 들고 걸으며 앞서 들은 이야기를 곱씹는다. 마냥 좌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북돋는, 느린 산책이 지닌 힘 속에서.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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