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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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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에 100세 보장이 무슨 의미일까?

등록 2024-04-13 14:00 수정 2024-04-19 08:04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안녕하세요. 미래생명 보험설계사 김주온입니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엠제트(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 가입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보험은 기후위기로 인한 다양한 위험에 맞서 공동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보험입니다. 저희 보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기후위기 이야기만 줄곧 올려서 구독자 수가 줄어들었거나 기후파업에 참여하느라 영업장 매출이 줄어든 경우처럼,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손해 혹은 기후위기에 특히 취약한 공동체를 도우려다 생긴 손해를 보상합니다.

반면, 국외여행에 가서 통구이 바비큐 먹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빈번하게 올리는 행위처럼 탄소배출이 큰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다가 발생한 손해는 보상하지 않습니다.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할 공적 자원을 고의로 고갈시키는 경우 혹은 미래를 비관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 발언만을 일삼다가 발생한 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아닌 ‘실천’으로 보험료 납입

2024년 3월30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울 을지로 다팜에 기후보험 상담센터 콘셉트의 전시를 열고 ‘미래생명’이라는 가상회사의 보험설계사로 근무하며 반복했던 대사다. 기후보험은 대구에서 비건 식당이자 제로웨이스트숍 ‘더 커먼’을 운영하는 강경민 대표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보험 상담을 받던 중 ‘기후위기 시대에 100세 보장이 무슨 의미일까?’ 싶어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자신의 삶과 가깝게 여길 수 있도록 보험 형식을 빌려 얘기하기로 한 것이다.

“저희 보험의 가장 큰 특징은 돈이 아닌 ‘기후 실천’으로 매월 보험료를 납입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실천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어요. 에너지 사용, 식생활, 자원순환, 돌봄, 정치적 행동 등 카테고리별로 나열된 보험료를 살펴보고, 일상에서 좀더 노력해볼 부분을 약정하면 됩니다. 또한 기본 보장에 더해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특별약관을 추가할 수 있는데요. 기후위기 취약 업종 특별약관, 성·재생산 권리 특별약관, 반려 동식물 특별약관, 민주주의 특별약관 등이 있으니 살펴보세요. 그럼 보험을 직접 설계해볼까요? 여기(theclimateinsurance.org)로 접속해주세요. 상품설명서도 내려받을 수 있어요.”

보험에 가입하면 보험설계사 자격증도 발급받는다. 실적 부담은 전혀 없지만,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내가 받을 수 있는 보장도 커진다. 이 사실을 알려주면 다들 어이없는 웃음을 짓지만, 설계사용 목걸이와 자격증을 야무지게 챙겨가신다.

경민씨 초대로 기획에 참여하며 고민이 많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보험’인지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와 국가 공동체의 책임을 놓지 않으면서 개인의 실천 역량을 끌어올리는 캠페인이면 좋겠는데 보험이라는 형식으로 가능할까? 그렇지만 전시장을 찾아준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내 안에서 뜻밖의 편견을 발견했다. 기후위기 문제는 심각하게 전해야 하고 재미있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엄숙주의 말이다.

실은 나도 기후보험 약관을 쓰면서 꽤 재미있었다. 기후위기로 일어날 일은 걱정스럽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인가 싶은 깨알 같은 상황에 유머 한 스푼 섞어 쓰는 게 적성에 맞았달까. 나아가 시야를 좀 넓혀서 보험을 자본주의 시대의 리스크 관리가 아닌 전통적인 ‘상호부조’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동의 미래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공동의 미래를 위한 기후보험 설계사들 파견

전시 마지막 날, 실제 보험설계사 자격이 있는 아티스트 이랑과 함께 보험 가입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 보험 진짠가?” 하며 호기심에 방문한 분들이 뿌듯한 얼굴로 미래생명 보험설계사가 되어 파견됐다. 이분들이 우수설계사로 활동하시도록 텔레파시를 열심히 보내야겠다. 가입자 4억 명을 목표로, 되어보자 보험왕!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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