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자기계발서에 홀로 심취해 있던 중학생 시절,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을 유난히 좋아했다. 용돈을 모아 꽤 비싼 ‘프랭클린 플래너'를 사기도 했다(난 계획을 지키기보다 세우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저자인 숀 코비가 내가 사는 전남 나주의 인근 도시에서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하교 뒤 친구 몇을 데리고 버스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강연장으로 향했다. 사전 행사로 마술쇼가 열렸는데, 현장에서 마술사 조수를 모집하자 흥분하며 단상에 올라간 뒤 정신을 쏙 빼앗기는 바람에 정작 강연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시종일관 객석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던 저자의 모습은 선명하다.
문득 약 20년 전 기억이 떠오른 건, BIYN이 주최한 연구공유회 ‘농촌에 사는 청소년은 기본소득을 어디에 쓸까?’에 참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였다. 2022년 농어촌청소년육성재단과 함께 농어촌 청소년의 생활실태와 기본소득 경험을 연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연천군 청산면에 가서 청소년들을 인터뷰했다. 만 18살 미만 청소년의 경우 부모에게 대신 지급하는 방식이었음에도, 기본소득이 엄연한 자기 ‘몫'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청소년들의 생활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봤다.
그날 연구공유회에 참석한 BIYN 회원 중에는 비수도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가 많았다. 농어산촌에는 하루 서너 번 들어오는 마을버스처럼 청소년의 이동성을 보장할 자원이 적어 다양한 경험과 자극이 부재하고, 이후의 삶을 적극적으로 탐색할 동기가 계발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다들 공감했다. 그러면서 각자의 청소년기에 무언가를 배우러, 예술을 감상하러, 자기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러, 정치적 주체성을 발휘하러 어딘가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순탄치 못했던 경험을 나눴다. 이동에는 돈이 들었고, 그 자원을 얻기 위한 협상은 지난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꽤 익숙했다. 그에 더해 기본소득은 나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내가 읽은 책의 저자(그것도 외국인)를 만나러 야심 찬 여정을 떠났던 중학생 때뿐만 아니라 친구 어머니를 따라 서울의 박물관에 가본 초등학생 때나, 롤모델을 만나러 서울의 사무실에 방문했던 고등학생 때도 생각난다. 돌아보면 머물렀던 시간만큼이나 살던 곳을 들락날락해본 결정적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연구 과정에서 재미난 경험을 했다. 인터뷰 분석을 위해 토론하는데 자꾸 각자의 과거 얘기가 딸려 나왔다.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나 언젠가 꺼내지길 바랐던 이야기가. 그러면서 농촌에 살던 청소년인 나와, 서울에 사는 비청소년인 내가 단절돼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부재하는지도 정확히 몰랐던 시절. 한편으로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충만함 또한 동시에 존재했던 짠하고 애틋한 시절. 그 위로 기본소득을 겹쳐보면서 위로받았다. 기본소득운동을 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확장된, 재연결의 순간.
그때 내게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무엇이 달라졌고 달라지지 않았을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회운동에 관심 갖게 됐을까? 여전히 서울에 살았을까? 기본소득운동을 하는 건 현재와 미래의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안에 여전한 과거의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한다. 또한 꿈도 욕심도 많은, 농촌에 사는, 나와 같은 현재의 여성 청소년 시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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