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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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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관제’ 애도에 저항하는 시민의 애도

참사 현장에서 포스트잇에 글을 쓰는 일의 의미
등록 2023-04-07 23:18 수정 2023-04-14 09:30
2022년 11월3일 서울 지하철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놓아둔 꽃과 포스트잇 메시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김정효 한겨레 기자

2022년 11월3일 서울 지하철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놓아둔 꽃과 포스트잇 메시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김정효 한겨레 기자

10·29 참사가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비좁은 참사 현장 골목길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을 앞에 두고 몸을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죽은 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까. 무슨 글을 남길까. 내가 여기 남긴 말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맹세가 공허해졌고, 약속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쓰는지 보려는 듯 어깨너머로 어른거리는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나는 기억하겠다는 글을 겨우 썼던 것 같다.

포스트잇 글쓰기, 몸의 메시지이자 몸의 정치

참사 현장을 찾아 포스트잇에 직접 손글씨를 쓰고 벽에 붙이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죽은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사 현장에 형형색색으로 나부끼는 수천 장의 포스트잇은 거대한 색채의 이미지 또는 정동의 이미지만은 아니다. 그것은 참사 현장에서 내 몸이 겪는 고통을 죽은 이들을 포함해 다른 몸들에게 전달하려는 몸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엘스페스 프로빈은 “글쓰기는 몸을 정동한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몸과 그것을 읽거나 듣는 몸들에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했다. 10·29 참사 현장에서 포스트잇에 글을 쓰는 몸은 그것을 읽거나 듣는 다른 몸에게 정동함으로써 10·29 참사 해결을 위해 함께 행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스트잇 글쓰기는 단순한 추모의 표현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애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함께 행동할 것을 다른 몸들에게 촉구하는 몸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10·29 참사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죽은 이들을 애도하지 못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참사 발생 12시간도 지나기 전에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해 참사를 사고로 축소·왜곡했고, 유가족들을 배제하고 고립시켰으며, 시민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관제 애도의 강요는 유가족과 시민들을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바리케이드 구실을 하면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요구를 지연시켰고, 그 결과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또한 지연되고 있다.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포스트잇 추모 행동은 윤석열 정부의 관제 애도에 맞서는 ‘애도의 정치’로 시작됐다. 참사 현장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려는 추모객 수만큼이나 많은 포스트잇이 참사 159일이 넘도록 쌓여가고 있다.

번역과 해석 기다리는 외국어 포스트잇

나는 2023년 3월 초순 문화연대에서 진행한 ‘이태원 기억 담기’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참사 현장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포스트잇을 수거하고 아카이빙할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소식에 신청했다. 포스트잇 수거 자원봉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최근 ‘애도와 책임, 10·29 이태원 참사’라는 특집을 함께 만든 <문화/과학> 편집위원들, 대학생, 다큐멘터리 감독, 지역 활동가, 문화공간 운영자 등이 그들이다. 모두 10·29 참사 해결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포스트잇을 분류해 A4용지에 붙이는 작업을 맡았다. 매주 수거해야 할 만큼 포스트잇이 많이 쌓인다는 데 놀랐고, 외국어로 쓴 포스트잇이 한글로 쓴 포스트잇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포스트잇 수거를 담당한 10·29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활동가에게 분류작업을 마친 포스트잇이 어떻게 보존되고 활용되는지 물었다. 그는 포스트잇을 수거하고 분류해 사진을 찍어두는 것 외에는 현재로서는 여력이 없다고 했다.

포스트잇 추모 행동은 참사 현장을 찾은 시민들이 직접 손으로 쓴 몸의 메시지다. 포스트잇 메시지를 다중이 만들어내는 대항기록이라고 할 때, 관제 애도에 맞선 메시지를 어떻게 역사 기록화할 것인지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특히, 우리가 읽을 수 없는 다양한 외국어로 쓰인 포스트잇에 어떤 몸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외국어로 쓰인 포스트잇이 번역과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본 걸 말해주는 내가 상주”

그날 포스트잇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두 명의 상인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그들은 참사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10·29 이태원 참사 추모 거리’의 상인이다. 먼저, 포스트잇 수거 작업을 하러 온 자원봉사자들을 따뜻하게 환대한 편의점 주인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분류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가게 앞 공간을 내줬고 따뜻한 음료를 내왔다. 한창 분류작업을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상인 한 분이 우리 작업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누구일까 했는데 옆 가게 주인이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태원 참사 상주야. 내가 여기에서 죽어가는 걸 다 봤잖아.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는 내가 본 걸 말해줘야 해서 나는 상주야”라고 말을 건넸다. 포스트잇을 수거하는 자원봉사자들, 자원봉사자에게 음료를 대접하고 자신을 상주로 여기는 참사 현장의 상인들…. 리베카 솔닛이 말한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공동체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정원옥 <문화/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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