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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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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사과하나?” “사과한다고 받아주나?

피해자가 받아줘야 가능한 ‘사과’의 무쓸모, 사과의 매뉴얼이 돌아다니는 엽기적인 사회에서 진정한 사과란
등록 2023-01-10 12:52 수정 2023-01-10 22:47
학교 학생들이 연극 무대에 올린 <소년B가 사는 집>.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학교 학생들이 연극 무대에 올린 <소년B가 사는 집>.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제가 연출하려는 이야기는 가해자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러고 나니 연출 방향이 보이더라고요.”

현지가 이번에 연출한 연극은 이보람 작가가 쓴 <소년B가 사는 집>이었다. 함께 가출한 친구를 죽이고 암매장했다가 보안처분을 받은 가해자 청소년과 그 가족의 이야기다. 이들의 집은 마을에서 악마가 사는 집으로 불린다. 보안관찰 중인 주인공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숨어지내며, 카센터를 하는 가족도 죄인이 되어 외부와 단절돼 살아간다. 연극은 친구를 죽이고 자기 가족 전체를 나락으로 몰아간 가해자 주인공이 자기가 맞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주는 행위

현지가 이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바로 한 말은 “감당할 수 있겠느냐?”였다. 나뿐만이 아니다. 연출을 담당하는 교수도 크게 걱정했다. 가해자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건 자칫 의도나 내용과 상관없이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주는 행위’로 비난받을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의 ‘안전’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서 연극의 메시지와 상관없이 다루는 소재로 인해 학생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신상공개 등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 우려됐다. 게다가 희곡을 쓴 작가에게도 누가 될 수 있다.

사실 한국 사회는 최근 몇 년 들어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피해자가 또다시 위험에 빠지는 것이 한국 사회였다.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던 분위기가 피해자들이 용기 내어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매우 고마운 일이고 서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어디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도 명확하다.

물론 가해자를 서사화하는 것과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주는 행위는 전혀 다르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보도’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으로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주고 그가 시민들에게 직접 자기 서사를 말하도록 내버려두거나 받아적었다. 이런 보도나 담론화 방식이 심각한 이유는 가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가해자가 서사의 주체가 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될수록 피해자는 다시 한번 그 대상으로 밀려난다.

반면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서사화, 가해자의 고백이건 주장이건 가해자의 말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사화는 가해의 구조적 측면을 이해하고 방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가해 이야기를 듣기 싫더라도 말이다. “내가 걔들을 왜 알아야 해?”라는 태도는 심정적으로 이해해도 결코 좋지 않다. 알지 못하면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벌이야말로 다스림, 즉 통치의 핵심 중 하나가 아닌가. 정말 제대로 처벌하고 싶다면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다루는 이야기가 얼마나 거부감이 드는지 잘 알기에 걱정이 더욱 컸다. 게다가 연출 담당 교수와 함께 가장 우려하는 대사가 있었다. 가해자 청소년이 자신과 맞서고 난 다음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구해야 해”라고 말하고 떠나는 장면이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용서를 구하러 가해자가 찾아가서 “만나줄 때까지 몇 번이고 사과”하는 건 과거에는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아름다운’ 모습일지 모르지만 현재는 스토킹, 범죄행위다.

모욕적인 서사, 그 자체로 받아들이자

다른 수업에서도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프로젝트라면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할지 토론했다. 수업이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미리 선을 그어 가르치는 이가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에 대해 학생이 스스로 판단하게끔 말문을 열어주는 시공간이다. 각자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그 진실에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수업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윤리적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과 함께 공부하는 교실이 자신의 진실에 대한 공간이자 윤리적 존재의 산실이 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다양했고 그 다양한 이야기는 말하는 주체로서 학생 각각의 진실이 담겼다. 어떤 학생은 이런 서사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학생에게 이런 사건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또 어떤 학생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 말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을 이러저러한 장면적 연출로 알려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학생에게 그런 장면 연출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꼼수’인지, 아니면 이야기의 동시대성을 환기하기 위한 장치인지 물었다.

이 과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의식 속에 분명해져야 하는 것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다. 전자의 이야기가 눈앞에 주어진 텍스트 혹은 독자에게 쥐여주는 텍스트라고 한다면, 후자의 이야기는 그 안에 감추어져 ‘읽어내야 하는’ 텍스트가 된다. 보이기만 하고 읽어낼 것이 없는 텍스트는 사실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런 텍스트는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며 소비되고 끝난다.

이 위험천만한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지가 알게 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바로 이 글의 맨 처음에 말한 것이다. 이 연극은 가해자에 대한 연극이며, 가해자에 대한 서사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돌려서 이야기하고 다른 장면적 장치를 쓰더라도 이 사실은 변함없다. 이 사실에서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이 시대가 가해자에 대한 일체의 서사를 모욕적인 일로 받아들인다면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현지는 시대를 거스르는 ‘반동적’인 일이더라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에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각오했다.

현지에게 물었다. 연극은 용서를 구하러 떠나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이후에 그가 용서받았을 것 같냐고 말이다. 현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못 받았을 것이라고. 용서받지 못했을 때 주인공은 무엇을 해야 하냐고 현지에게 물었다. 원하지 않는 사과로 피해자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다시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피해자 가족이 용서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예 사과를 거부하고 가해자는 처벌받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원하지 않는데 한다면 처벌받아야죠. 주인공이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과 타인에게 무슨 일인지를 알 때 마지막 장면이 나오는 것 같아요.”

용서와 무관할 때 의미 있는 사과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이야기의 맨 앞에 나오는 것이 첫 사건이지만 창작하는 이는 항상 첫 사건의 앞, 전사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인공은 앞의 이야기/사건을 가지고 첫 장면에 등장한다. 이야기의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막이 내리는 것을 보는, 독자는 책을 닫으며 읽는 것이 주인공의 마지막 행동이지만 이야기꾼은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야지만 그 마지막 행동을 설정할 수 있다.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 마지막 장면의 다음 행동으로 마지막 장면이 가능해진다.

용서를 구하러 떠나는 장면 역시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의 행위를 그려야 가능해진다. 용서를 청하겠다는 주인공이 자기 행위의 여파가 어떠할지를 알고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사과가 피해자 가족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서 또 하나의 고통을 그들에게 가하는 범죄행위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처벌받는 것까지 각오하더라도 피해자 가족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할 일이다.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서 사과가 아니라 ‘속죄’로서 사과,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마지막 장면에 부여할 의미다.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것과 자신의 죄/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지만, 후자는 용서 여부와는 무관하다. 사과는 용서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용서와 무관할 때 사과로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것 때문에 사과는 거의 불가능한 행위다. 용서만큼이나 종교적 행위에 가까운 것이 사과다.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행위의 ‘무쓸모’에도 속죄로서 사과하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과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또 한번 고통을 가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멈춰야 할 수도 있다. 사과를 멈춰야 속죄가 가능해진다. 사과의 불가능성을 직시할 때 사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맞서는 사과’로서의 속죄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학교에서 공연하는 연극 하나를 연출하면서도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토론한다. 주어진 대로 하면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보여줄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실패할 수 있기에 마음 졸이며 서로 머리를 맞댄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물며 나라의 일은 어떠해야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실상은 정반대다. 사과의 이 ‘무쓸모’를 깨닫는 순간부터 평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정치인부터 앞장서서 사과에 대해 매우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는가?” “사과한다고 받아주기나 하나?” 이런 냉소가 사회에 만연한 이유다. 사과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사과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으려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엽기성’은 사과의 ‘매뉴얼’ 따위가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사과가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가능한 속죄는 고사하고 정치적 제스처로서도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과를 노골적으로 냉소하고 비웃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굴욕·모욕 느끼는 국정조사지만 계속해야

속죄하기 위해 사과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과 자체가 ‘상갓집 개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잔혹함이 있다. 국정조사가 연장되더라도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모두가 다 잘 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오가는 말과 태도로 피해자와 유가족이 굴욕과 모욕만 더 느낄 것이다. 그 취급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국정조사 연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처참하지 않은가?

불가능하다는 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건 그것을 직시했을 때 오히려 새로운 행위와 의미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과의 불가능성을 직시했을 때 속죄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듯이 말이다. 이야기가 불가능성이라는 현실의 잔혹함과 처참함을 놓치지 않되 거기에 멈추면 비참을 전시하고 고통을 경쟁하는 ‘포르노’가 되고 만다. 한편에선 동시대의 잔혹함과 씨름하되 다른 편에선 그 잔혹함을 다루는 자신의 이야기가 ‘포르노’가 되는 것과도 맞설 때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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