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결혼 초기 스트레스 많으시죠?”
항소심 선고 당시, 피해자는 3년가량 걸린 수사·재판 과정을 함께해온 배우자의 손을 붙잡고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판사가 왜 저런 말을 하나 궁금해하던 피해자를 대상으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0부 이재희·박은영·이용호)는 ‘피해자의 심리적 장애(PTSD 등)가 결혼 초기의 스트레스 등 요인으로 인해 발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덧붙이며 1심과 마찬가지로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항소기각(면소)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는 13살 미만 아동이었을 때 당시 촉법소년(만 14살 미만)이던 사촌오빠에게 첫 강제추행 피해를 당한 뒤 10년 동안 22차례 성폭력을 당했다. 이후 수면장애 등 여러 어려움을 겪던 피해자는 외국으로 나갔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이어간 피해자는 직장에서 인정받고 결혼을 통해 안정도 찾았다. 그러나 2018년 이후 공황장애 등이 발병했다.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과거 친족성폭력 피해 사실을 외부에 처음 말하고 2020년 고소에 이른다.
대검찰청이 발간한 ‘2021 범죄 분석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13살 미만 성폭력범죄 피해자 중 17.6%가 친족성폭력 피해자로 나타났다. 대표적 암수범죄(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숨겨진 범죄)인 친족성폭력의 특성상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절반 이상(55.2%)은 피해 이후 상담까지 10년 이상 걸린다. 상담 시점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도 57.9%에 이른다. 이 사건 역시 피해자가 스스로를 친족성폭력 피해자로 인지·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진단·치료를 받은 것은 성인이 되고 8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공소시효가 문제됐는데 검찰은 피해자가 성인이 된 2010년을 기준으로 2020년 아직 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가해자를 기소했다(‘강제추행’의 경우 공소시효가 7년이라 시효가 완성된 상태였다).
이 사건 재판에서는 1차 피해(강제추행)와 2차 피해(PTSD 등 심리적 장애)의 인과관계 입증이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었다. 피해자는 배우자와 함께 3년여 동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모든 공판을 방청하고 트라우마 진단 결과 등을 제출했다. 피해자는 1심 판결 선고 이후, 시효 문제로 고소조차 하지 못했거나 여전히 고소를 고민 중인 친족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인과관계에 대한 외부 의견을 청취하는 등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판부는 의학 분야 전문가를 전문심리위원으로 선정해 강제추행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인과관계에 대한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쳤다. 이 전문심리위원은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 장애가 어린 시절 피고인에게 당했던 강제추행에서 기인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제추행과 PTSD의 인과관계는 원인사건(강제추행)과 결과사건(심리적 장애)의 상관, 원인사건과 결과사건의 선후 관계(원인이 결과보다 선행해야 한다), 결과사건에 영향을 주는 외부 요인의 부재 등을 토대로 판단하는데, 전문심리위원은 강제추행 외에 피해자의 심리적 장애를 설명하는 다른 외상적 스트레스 요인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했다. 피해자의 주치의, 심리상담사, 트라우마 분야 전문가 등도 유사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강제추행과 관련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인정하는 취지이나, 1·2차 피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시효가 지나 면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마지막 추행 행위와 피해자의 심리적 장애 발병 사이 10년이 넘는 시간 간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직접 지정한 전문심리위원이나 외부 전문가들의 견해 역시 피해자의 주관적 진술에 의존한 의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다수의 전문가가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했음에도 재판부는 자신들의 판단에 힘을 실어줄 단 한 명의 전문가 의견을 들어 다른 요인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판단했다.
재판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그 원인을 추정했다. 피해자의 원가족, 오랜 기간 외국 생활을 하고 있는 피해자의 상황, 발병 무렵 결혼한 사실 등을 들어 그런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내에서 학업을 중단한 피해자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던 원가족의 희생과, 중단한 학업을 외국에서 이어가며 자신의 일상을 꾸렸던 피해자의 삶, 3년가량의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지지하며 함께 미국과 한국을 오갔던 배우자 등을 같이 모욕한 것이다.
심지어 재판부는 재판 절차에 적극 참여하는 과정에서 PTSD 등 심리적 장애가 발병·심화했으리라는 판단까지 했다. 이런 재판부의 판단은 성폭력 피해자의 적극적인 재판 절차 참여를 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부담스러워했는데, 결국 판결문에서 발병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형태로 피해자를 공격했다.
아동 때 테니스 코치한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민사소송에서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피고(가해자) 쪽 주장에 대법원은 “성범죄로 인한 PTSD가 뒤늦게 나타나거나 직후 증상이 발생해도 당시에는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피해자는 본인의 싸움을 ‘실수’와 ‘잘못’으로 표현했다. 3년 정도 곁에서 그의 싸움을 지켜본 입장에서 그의 말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아니다. 당신의 삶과 싸움은 실수나 잘못이 아니다.
‘법대로’ 해서 피해를 인정받고 회복하며 일상을 다시 만들어가는 게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그 과정에서 추가 피해로 피해자가 얼마나 더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회가 답해야 한다. 친족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소멸시효 폐지와 연장,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 권리 보장,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대상의 추가 가해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 시민의 사법감시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를 포함한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당신들의 곁에서 할 일을 계속하겠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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