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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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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가해하는 기사가 재판실험이었다니

서울고법 민사18부, 기자를 성폭력 재판 배심조정위원으로 선정
‘회복적 사법’ 주장했지만 적나라한 평의 과정 보도로 2차 피해
등록 2022-10-26 00:36 수정 2022-10-26 09:14
영화 <배심원들> 속 한 장면. 배심조정제도는 민사조정 절차에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접목한 것으로, 조정위원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역할을 한다. 씨지브이(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배심원들> 속 한 장면. 배심조정제도는 민사조정 절차에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접목한 것으로, 조정위원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역할을 한다. 씨지브이(CGV)아트하우스 제공

‘그가 한 행위는 성추행일까… 배심조정위원 참여해보니’.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 각 포털사이트에서 여성 대상 폭력·살인 사건 관련 뉴스를 정리하는데 이 제목의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기사에 나온 사건은 가해자가 A집단 내부의 징계에 무효를 주장하며 낸 소송으로 성폭력 사건과 연관됐다. 그런데 현직 기자가 배심조정위원으로 참여한 뒤 서울고법에서 받은 자료 이미지(사진)를 기사에 첨부하고, 평의 과정과 평결 내용을 상세하게 늘어놓은 기사를 썼다니 믿을 수 없었다. 기자는 더구나 피해자 특정이 가능할 만큼 사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다.

피해자 특정이 가능할 만큼 상세한 기사

배심조정위원은 사건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면 처벌받는다. 민사조정법 제41조에 따르면, 조정위원은 국민참여재판(형사)의 배심원처럼 평의·평결 내용이나 각 조정위원의 의견, 조정 과정에서 알게 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벌금형이나 징역형의 처벌을 받는다. 처음에는 재판부가 조정위원으로 참여한 기자들에게 비밀유지 의무를 고지했는데도 기자들이 이를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조정위원으로 선정된 일부 기자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이 기사화된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니, 조정위원이던 기자들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과 평의 결과까지 상세하게 적은 보도자료를 배포했음을 알게 됐다. 더구나 재판부(서울고법 민사18부, 정준영·민달기·김용민 판사)가 기자들에게 조정위원을 제안하는 등 이 사태를 주도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큰 충격에 빠져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피해자는 1심 재판에서 가해자에 대한 징계 처분의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 진술이 필요하다는 재판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소송 당사자가 아님에도 법정에 섰다. 아니나 다를까, 가해자 쪽 변호인의 악의적인 질문에 그대로 노출된 피해자는 장시간 진술하는 과정에서 사건 당시 상황을 복기하고 그 피해를 재차 경험하면서 호흡곤란이 와서 재판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쳐 1심에서 피고(A집단) 쪽이 승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또다시 피해자를 불러내 진술을 들어야 한다며 원고와 피고 양쪽에 ‘배심조정제도’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피해자는 망설였지만 재판부가 ‘피해자 보호’를 약속했고, 조정위원에 기자들이 포함됐지만 조정 내용 외부 공개가 위법이므로 비밀유지가 되리라 생각하고 고민 끝에 다시 법원으로 갔다.

배심조정위원들의 의견은 엇갈렸고 2심 재판부는 1심보다 약한 수위의 징계를 내리라고 조정 결정을 했다. 일상을 되찾으려 노력하던 피해자는 조정 결과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조정 결정 이후에 쏟아지는 기사와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피해자는 무너졌다. 이 재판부가 ‘회복적 사법’(치료적 사법)을 내세워 각종 사법 실험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기에 충격은 더 크다.

2심 재판을 맡은 정준영 판사는 2006년 장흥지원장 시절에 배심조정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미국식 배심 재판을 민사조정 절차에 결합한 것으로, 배심조정위원들의 조정안을 소송 당사자에게 권고하는 방식이다. 정준영 판사는 ‘형사화해제도’ 도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회복적 사법’의 하나로 소개하며 실현하기도 했다. 이번 재판도 평소 그의 신념에 기반한 사법 실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는 실험체가 아니다. 재판부가 조정 이후 관련 내용을 외부에 유출하는 데 관여했다는 점은 그가 내세우는 ‘회복적 사법’에 피해자 자리는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배심원단에게 잘못된 통념이 있다면

실제 배심조정제도는 그간 지역 내 분쟁 해결 등에 활용됐다. 성폭력 사건에 활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배심원제도가 접목된 ‘국민참여재판’도 성폭력 사건의 경우 배심원단의 성 고정관념이나 강간 통념의 발현과 연관됐다는 연구결과가 있다.(‘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배심원 지침에 관한 연구’, 사법정책연구원, 2022) 편견에 사로잡히기 쉬운 배심원단의 충분한 사전 교육 등이 전제되지 않은 국민참여재판은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실체적 진실 발견을 어렵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사재판의 배심조정제도 역시 배심원 선정부터 더 많은 한계를 가질 위험이 있다. 조정위원들의 자질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북부지검에서 한 조정위원이 성희롱 피해자에게 ‘내가 봐도 미인인데’라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재판부의 이번 시도는 섣부르고 부적절했다.

미국식 배심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영화배우 조니 뎁의 가정폭력 사건 관련 명예훼손 소송이다. 이 재판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인 앰버 허드가 패소하는 데 배심원의 편견이 강력하게 개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크 스티븐슨 국제 미디어법 전문변호사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성폭력·가정폭력 재판에서 흔히 쓰이는 방어 전략 ‘DARVO’, 즉 부정하고(Deny), 공격하고(Attack),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꾼다(Reverse Victim and Offender)에 배심원단이 취약하다는 점을 짚었다. 이처럼 여러 한계가 있는 배심조정제도를 무리하게 성폭력 사건에 적용한 재판부의 오판과 욕심이 피해자의 삶을 짓밟았다.

“저보다 취약한 피해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요.” 재판부 기피신청, 재판부와 기자들에 대한 고소·고발 검토 등을 하는 가운데서도 피해자는 자신보다 더 취약한 위치의 피해자들을 걱정했다. 그런 그에게 법원과 언론이 할 일은, 각자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을 보이는 것이다. 몇몇 기자는 고소·고발을 검토한다는 것을 알고 기사만 삭제한 뒤 지금도 침묵하고 있다.

기사만 삭제하고 침묵하는 언론

더 이상 법원과 언론은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담보로 한 실험이나 기사 작성을 하지 말아야 한다. 2011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증인신문을 마친 피해자가 “모멸적”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숨지자, 법원은 그제야 증인지원 절차를 마련했다. 2022년 10월18일 전주환 스토킹 살인사건 1심에서 피해자 유족은 ‘한국 언론의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보도 때문에 고통스럽다’며 비공개 심리를 요청했다. 한국 언론은 언제쯤 피해자를 사냥하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평생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나 피해’는 바로 당신들이 만들고 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n번방 재판 방청기: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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