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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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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엉엉 울어버리고 마는걸

막 태어난 아이에게 ‘죽음’이라는 적이 덮치는 신생아중환자실, 그 상황을 전달해줘야 하는 의사는 죽음에 무뎌져야 하지만
등록 2022-10-11 16:45 수정 2022-10-12 09:13
한 병원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입에 문 채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신생아. 한겨레 자료

한 병원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입에 문 채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신생아. 한겨레 자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기가 많이 아파요. 진짜 곧 죽을 수도 있어요. 이제 몇 분, 아니면 몇 시간 남지 않았어요.”

이상한 울음 우는 엄마, 하얗게 변한 아빠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 죄수들의 표정이 그럴까. 부모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엄마는 목구멍 안으로 기어드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엉엉 울고 싶은데 아기한테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같이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해요. 심장박동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가슴을 누르고 약을 투여해야 해요. 치료를 원하세요?”

이제는 아빠가 나를 증오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죽는다고요?”

“아니요. 지금 당장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곧 심장박동수가 내려가고, 의사인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멈추고 죽겠지요. 가슴을 누르고 약을 투여하면 심장이 다시 뛸 수도 있어요. 그걸 몇 번 하다보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지금 아기가 너무 아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했어요. 그래도 아기는 살지 못할 거예요. 아기가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아기를 꼭 안고, 그렇게 보내주는 건 어때요?”

“가슴을 누르고 투약하면 살 수 있어요?”

“다시 심장이 뛸 수도, 아니면 아예 안 돌아올 수도 있어요.”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네, 가능성은 있지만 우리가 뭘 해도 오늘 아니면 내일 죽을 거예요.”

아기 아빠는 내가 칼로 자신을 찌른 듯이 괴로워했다. 혈관에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처럼 원래 하얀 얼굴이 내가 꼭 쥐고 있던 종이처럼 더 하얗게 변했다. 아마도 겨우 잡고 있던 기적을 향한 희망이 산산조각 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조각들을 내가 부모의 가슴에 박은 것이리라. 자식을 앞서 보내야 하는 부모다. 그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이제는 보내야 한다고 그 시간을 정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선생님 아기라면 어쩌시겠어요?

“선생님 아기라면 어쩌시겠어요?”

아기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바다색같이 파란 눈 때문인지 몰라도 이제 얼굴은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것 같았다. 옆에서 아직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우는 아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전한 죽음의 비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명백한 것은 나는 아기의 부모에게 질문했고 그들은 내게 다시 질문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내 전문적인 소견을 넘어 개인적 의견을 묻는 것이다.

“제 아기라면… 저라면 아기를 품에 안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어요. 더 큰 사랑은 아프지 않게 잘 보내주는 거라 믿기 때문이에요.”

벌겋다 못해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참고 누르다 꺽꺽 소리를 내는 엄마의 모습을 한 나는 그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짧았다.

“이제 보내주죠.”

나는 신생아중환자실 의사다. 갓난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집에 가는 순간까지, 혹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의사다. 나는 이른바 ‘블랙 클라우드’라고 불리는 운이 나쁜 의사다. 나만 병원에 들어가면 멀쩡하던 환자 상태가 나빠지거나, 아픈 환자들이 들이닥치거나, 심한 경우 급작스럽게,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운 죽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련의 때부터 이어온 악운의 먹구름은 내 머리 위를 맴돌며 배움의 기회를 내리기도 했지만 눈물과 고통의 순간을 자주 안겨주었다. 어찌 보면 이런 배움의 기회가 나를 좀더 나은, 경험 많은 의사로 만들어줬는지도 모르겠다.

수련의 때였다. 백발의 교수님이 “아이가 있으니까 슬픔이 배가 되지 않아? 아이들이 아파서 죽을 때 말이야”라고 물었을 때 마음속으로 난 원래 동정심이 많고 공감력이 좋아서 아이가 없을 때도 많이 슬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아이가 커갈수록 이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맞닥뜨릴 때면 백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뜻하지 않은 죽음이 다가올 때면 같은 인간으로서 또 엄마로서 마음의 고통이 곱절이 된다.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우는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보면서 내가 느끼던 슬픔은 지금 슬픔의 반의반도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모든 죽음에 매번 엉엉 울어버리는 내가 의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자주 만나는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믿었고 또 무뎌져야 하는 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멘토는 나를 안아주며 이렇게 위로했다.

“네가 만약 모든 죽음에 매번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 일을 그만두는 게 맞을 거야.”

그 말은 위로를 넘어 어쩌면 내가 괜찮은 의사가 될지 모른다는 위안이 됐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시키기

나는 의사다. 그 전에 한 인간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아기가 살도록 돕는 것도, 편안하게 죽도록 도와주는 것도 내 직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임무는 아기의 가족이 힘든 시간을 잘 건너도록 돕는 것이다. 나의 멘토는 늘 말했다.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기의 가족을 도와주는 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이야. 그냥 보통날을 보내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

그렇다. 가장 힘들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은 잊히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의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음 앞에 바로 놓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부모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라도 이 상황이 닥치면 이성적 판단과 정상적 인지활동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불가능의 대화를 나는 매일 하고 있다. 만난 적도 이길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적이 자기 아기를 덮치는 상황, 그 상황을 전달해주는 일, 그게 바로 내 업무다. 하지만 깜깜한 동굴에서 그들을 꺼내 옳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자 신생아중환자실 의사의 의무이다.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몸이 아픈 아기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기 가족의 마음도 치료해주고 싶어 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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