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신당역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사건이라는 점은 다수 시민의 의견인 듯하다.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음에도 법과 제도가 막지 못했다. 한편에서는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법의 인식이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선 있는 법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구속에 대한 판단은 신중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이 사건의 경우 판사가 피해자의 위해에 주목했다면 충분히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많은 법조인의 판단이다.
왜 판사에게는 스토킹 범죄의 재범 위험에 대한 알람이 울리지 않고 피해자의 위해 여부에 대한 ‘우려’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당사자만이 그 진실을 알겠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도주 위험이 없고 주거가 일정하다는 법적 형식논리에 충실했던 것 말고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그 판사가 스토킹 범죄로부터 매우 안전한 거리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스토킹 범죄에 대해 안전한 ‘만큼’ ‘무지’한 사람이다. 그냥 무지한 것이 아니라 무지해도 안전할 수 있는 위치다. 이 경우 무지는 권력이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알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한 다른 좋은 사례가 있다. 1970년대만 해도 겨울이면 신문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람이 숨지는 기사가 거의 날마다 실렸다. 사람들은 가스 중독 사망 사고 보도를 보면서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신문에서 사고 방지법을 이야기해줬지만 사람들이 일상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경각심을 높이고 조심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 보도가 사라진 이유는 물론 연탄을 때는 집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가장 크다. 그러나 신문기자들이 연탄을 사용하지 않는 집으로 이사 갔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보도하는 사람의 일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여전히 달동네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겨울 난방을 연탄에 의존하는 집들이 있었지만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이 말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 진술이 가진 일말의 진실은, 말의 권력을 지닌 누군가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사건을 무시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도 무지가 권력이다.
무지가 권력이 되는 것은 한국의 교육과정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게 한다. 교육이란 인식의 확장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많이 배웠다는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 생활세계 바깥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무지할 수 있는가? 더구나 자신의 선택으로 그 바깥 세계 사람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모를 수 있다. 자신이 안전한 만큼 그 사안의 중대성이나 재범의 위험이나 피해자의 위해에 대해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경우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똑똑한 자들’에게 경고했다. “너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라”고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기의 정체성을 알라는 말도 주제를 알라는 말도 아니고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말이다. 따라서 똑똑한 자란 어떤 일을 대할 때 이것이 내 생활세계에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 ‘무지에 대한 앎’에서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조심스러워지고 알려는 욕망이 생긴다. 그러면 물어보게 된다. “이것은 내가 모르는 일인데 어떤 것입니까”라고 말이다. 수천 년간 반복된 말처럼 현명한 사람이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좀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넘어 자신의 전문 분야인 ‘법의 무지’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데 법이 선도적으로 예방하기는커녕 법은 변화를 뒤쫓아가기에도 급급하다는 점을 알 것이다. 디지털성범죄가 그렇고 학교폭력이 그렇다. 과거에는 대수롭지 않던 것이 지금은 사람의 인격을 근본부터 파괴하지만 무지한 법은 그 뒤를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한다는 사실, 즉 ‘법의 무지’를 알 것이다. 이 법의 무지에 대해 무지하면 그는 법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법조인들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법 자판기’가 되고 만다.
문제는 이 무지한 자들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는 무지하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잘 알아 ‘우려’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엘리트’들의 미래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번 범죄에서도 언론이 추측하는 바에 따르면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유 중 하나가 가해자에게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 자격증이 있다는 건 그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하고 신분이 확실한 만큼 도주의 위험이 없음을 보장한다. 나아가 그의 전도유망한 미래를 ‘염려’하고 국가적 ‘손실’을 막기 위해 선처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이런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학교폭력 사태에 전문 로펌이 개입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 무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 법과 엘리트라는 동류의식으로 뭉쳐 있는 자기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지에 대한 앎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겨우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자신의 언어-법을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법이 무지한 흉기가 되는 것을 겨우 피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법의 무지’라는 암흑, 즉 동시대성을 직면하고 맞서는 ‘동시대인’이 될 수 있다. 현재 법(과 법관 및 엘리트 양성 과정)의 가장 큰 문제는 만남을 통해 ‘동시대인’이 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며 자기 세계에 동류로 틀어박혀 ‘법-기술자’가 돼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법-기술자’의 삶에 무슨 감동이 있고 어떤 서사가 가능하겠는가. 그 서사는 잘돼봤자 시대에 편승한 성공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당대에는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술 정도나 가르쳐주는 솔깃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시대가 몸을 뒤틀 때 ‘악당’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법이 삶에 대해 무지할 수 있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던 그 충실한 삶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졸지에 불의를 옹호하는 악당의 행위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더 슬픈 것은 이 악당은 ‘충실함’ 외에 그 어떤 자기만의 고유함/독특함이 없는 캐릭터인지라 ‘인물’이 되지 못하고 시대에 대한 소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를 깨지 못하고 그 세계에 ‘충실한’ 자가 어떻게 그 세계의 부품으로서 비극적으로 나락에 빠지는지를 보여주고 경고하는 ‘교훈적 존재’로만 이야기에 등장한다.
자기 세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남이다. 그저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의미에서의 만남, 타인의 세계를 듣고 이해한다는 정도에서의 만남이 아니다. 만남의 교육적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다. 만남은 타인의 신체를 빌리는 행위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내 귀로는 들리지 않는 것, 즉 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듣고 타인의 팔과 다리에 의존해 세계를 감각하고 지각하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 나로서는 동류를 통해서는 절대 감각하고 지각하지 못하는 것을 감각/지각하는 것, 그것이 만남이다. 사람은 이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동류의 세계를 깨고 나오며 타인의 신체로 확장하고 연합하며 동시대인으로서 시대의 어둠을 함께 응시하며 맞설 수 있다. 법의 무지, 법의 공백이 동시대에 드리우는 어둠에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엘리트 양성 과정이 어떤 ‘끔찍한 과정’인지를 보게 된다. 만남이 없다. 알지 못하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세계를 깨기는커녕 끊임없이 동류만 만나 철옹성처럼 권력인 자신들 언어의 바벨탑을 쌓게 하는 것이 한국의 엘리트 양성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엘리트들은 철저하게 타자의 삶에 무지한 자, 무지하면서 그들의 생사가 걸린 무기를 무감하게 기계적으로 휘두르는 자가 되고 만다.
이 삶은 동시대에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기쁨은 없다. 인간의 기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은 자기를 넘어서는 기쁨이다. 남의 신체로 확장될 때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타자라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나’로 머무르는 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것, 자기를 확장하는 것보다 더 큰 환희는 없다. 그렇게 나를 넘어 확장될 수 있음, 그것을 통해 인간은 ‘가능한 존재’로 지속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존재’로 열려 살아가는 일보다 더 기쁘고 충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7인의 셰익스피어>의 대사처럼 그래야 “아침이 오는 게 너무너무 기다려”지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은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법의 무지/공백을 온몸으로 응시해 맞고 있는 이 시대의 주인공들을 만나 자신의 오만과 무지를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이들을 만나 자신이 무지한 법의 무지한 노예임을 깨달으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란 노예인 줄 몰랐던 자신의 삶이 노예임을 깨달으며 그 노예의 삶을 끝내고 주인이 되려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피해자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가 이미 시대의 어둠을 응시한다는 것, 그의 상처는 바로 동시대인으로서의 응시와 맞섬의 결과임을 아는 것이 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 나를 동시대인으로 구축하고 구원하는 서사의 출발점이다. 법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동시대인의 이야기로 듣는 것에 무지함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 법 자신을 구원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법은 실패했지만 이야기는 끈질기게 계속돼야 한다. 이 실패마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법의 실패와 대면해야 한다. 법의 무지를 넘어 법의 실패, 이것이 지금의 시대성이며 이 시대성에 맞서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며 역할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한겨레21> 제1365호에서 하급심 판결을 존중해달라는 판사에게 편지를 쓴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의 글이 바로 그렇다.)
학생들과 나는 사건을 읽고, 작품을 읽으며 법이 만나고 읽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삶, 실패한 그 법을 온몸으로 응시해 만나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동시대인으로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묻고 또 묻는다. 한 사람의 인물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약간 비장하게 말하면 이 불가능의 시대에 구원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야기꾼의 사명이니까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같이 고민해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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