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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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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의 호소를 들어라

유치원에서 정서적 학대 당한 뒤 PTSD 진단까지 받았지만
‘아동 진술’만 있다는 이유로 신고 8개월 뒤에야 피의자 조서 작성
등록 2022-04-21 00:56 수정 2022-04-21 11:53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교사의 지도로 게임을 하는 모습이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기록되고 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이정우 선임기자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교사의 지도로 게임을 하는 모습이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기록되고 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이정우 선임기자

6살 아이가 유치원에서 겪은 학대 경험을 털어놨다. “○○반에서 있었던 슬픈 일, 자꾸 생각나. 지울 수가 없어.” 그렇게 시작된 아이의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2021년 8월의 일이다.

“○○반에서 (선생님이) 억지로 먹인 것, 너무 슬퍼.” “밥을 억지로 먹이는 걸 안 하면 (좋겠어). (선생님이) 사과했으면 좋겠어. 미안하다고.” “(선생님이 억지로 먹일 땐) 너무 힘들어. 그냥 김치를 올려서만 줄 땐 맛있는데 막 넣을 때는 조금 힘들어.” “‘먹기 싫어요’ 했는데 그래도 먹으라고 했어.” “그게 너무 슬퍼서 화장실로 달려가서 뱉었어.” “(입을) 막았는데 벌리라고 했어.” “억지로 먹으라고 소리 질렀어.” 선생님이 자신에게 억지로 먹였던 밥과 반찬, 당시 상황을 아이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법원은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행위를 정서적 학대로 판단한 판결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1

“억지로 먹여 힘들고 슬퍼… 화장실 가서 뱉어”

김지민(가명)씨는 딸 수민(가명)이 이렇게 힘든 기억을 꺼낼 때마다 기록을 남겼다. “선생님이 조금씩 먹여준 것 아니냐”고도 물었지만 수민은 선생님이 많은 양을 한꺼번에 먹였다는 것, 소리를 지르며 입에 억지로 음식을 넣었다는 점을 엄마, 친구, 담임교사에게, 해바라기센터 진술과 정신의학과 진료 등에서 일관되게 말했다. 아이의 말과 유치원 식단표를 비교해보니 실제로 아이가 언급한 반찬이 나온 날이 두 차례(2021년 2월, 2020년 10월) 있었다.

아이의 진술은 상세하고 한결같았지만 아동학대 신고 과정에서 아이의 목소리는 ‘들려지지’ 않았다. 처음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 김씨는 유치원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별다른 조처는 없었다. 다음달인 2021년 9월엔 아이가 유치원에서도 친구들과 새로 바뀐 담임교사에게 이전의 강제 식사 경험을 반복해서 털어놓으며 불안해했다. 새 담임교사가 유치원 원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는데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김씨는 “(유치원에선) 아이가 놀이하며 한 말이라 (아동학대가) 의심되지 않았다며 신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은 이와 관련한 입장을 묻고자 해당 유치원과 원장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10조는 “아동복지시설의 장과 그 종사자가 아동학대 범죄를 알게 된 경우나 그 의심이 있는 경우 시·도 등 지방자치단체 또는 수사기관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찰의 반응도 미적지근했다. 2021년 9월 서울경찰청 아동학대특별수사팀에 사건이 배정된 뒤, 10월 김씨는 첫 참고인 진술을 했다. 아이의 음성 녹음 40여 개, 해바라기센터에서의 진술, 정신의학과 진단서, 심리검사서 등을 제출한 뒤였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친구가 있다는 점도 말했다. 하지만 이날 김씨가 담당 경찰로부터 들은 설명은 “아이의 진술 외에 진술을 증명할 증거가 없거나 부족하면 처벌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는 것이었다. 유치원 교사에 대한 조서 작성은 신고 후 8개월이 지난 2022년 4월에야 진행됐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조서 작성만 4월에 했을 뿐 계속 전화 등으로 피의자 진술을 확인했다. 성폭력 사건은 성폭력처벌법에 따라 진술분석이 가능한데 아동학대는 관련 법적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해당 사건에 대해선 이례적으로 진술분석을 세 차례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의 ‘들려질 권리’를 위해 엄마는 백방으로 뛰었다. 수민이는 △과거 사건에 대한 반복회상 △사건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분리불안 △정서적인 불안정 상태 등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진단받았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자 김씨는 전문가들을 찾아나섰다. 아동학대, 아동심리, 수사 전문가들에게 거듭 전자우편을 보내 자문했고 아동학대 관련 판결문을 찾아 읽었다. 교육청에 민원도 넣어보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실을 찾아갔다.

아동성범죄와 관련해 피해아동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했던 대법원 판결(2020도2433)을 읽어보며 수민의 진술과 비교해 정리한 서류도 제출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스스로 수치스러운 피해 사실을 밝히고 있고 (중략) 진술 내용이 사실적·구체적이고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면, 그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물증’ 안 남는 정서적 학대

김씨는 “이 많은 자료를 경찰에 냈는데 반년 동안 제대로 된 피의자 조사가 없다가 2022년 2월 새 수사관이 오고 나서야 수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며 “아이의 진술만으로 모든 혐의를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진술 자체를 후순위로 두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체에 뚜렷한 증거가 남지 않는 ‘정서적 학대’는 ‘중복 학대’를 제외한 네 가지 학대 유형(신체학대·정서학대·성학대·방임) 중 28.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2020년 보건복지부 ‘아동학대 주요 통계’)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정서적 학대에 대한 이해도가 사회적으로 많이 낮을뿐더러 (CCTV 등) 물증만을 중심으로 하는 수사에 변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폭력처벌법 제33조는 법원과 수사기관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복지학자 등 전문가에게 피해자 진술 내용에 관한 의견을 조회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두고 있지만, 아동학대처벌법엔 해당 조항이 없다. 관련 예산이 따로 편성되지도 않는다. 학대 사건에서 피해아동의 진술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 교수는 “아이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을 수도 있고 오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성인의 진술을 중요한 증거로 보고 분석하는 것만큼 (아동 진술도) 주요하게 분석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며 “아이가 (성인에 견줘) 미숙하다고 말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한테 벌어진 일을 정확하게 얘기할 수 없는 건 아니다”라고도 덧붙였다.

진실규명은 ‘얼마나 귀 기울이느냐’에 달려

초기 대응에 따라 사건 향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아동의 증언과 관련해 “수사나 공판 절차에서, 특히 시기적으로 이른 단계에 전문가들이 개입할 필요가 있고 법관·검사·경찰들이 이들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 기울이는가에 따라 진실규명 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2 아동의 기억이 일정한 자기암시 때문에 연쇄적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고, 이 경우 반대신문 과정에서도 진위를 밝히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수민이는 트라우마 탓에 결국 2021년 10월 유치원을 퇴소한 뒤 요양 중이다. 김씨는 “아이가 힘들다고 울부짖는 소리를 녹음하며 스스로도 미쳐가나 싶기도 했지만 아마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은 하나다. “수사 과정에서 물증만을 중시하는 인식 자체가 개선됐으면 해요. 신체적 학대가 아니라고 소극적으로 수사한다면 앞으로 정서적 학대와 관련해선 가해자 없는 피해자만 늘어날 테니까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참고 문헌
1. 부산지방법원 2012고단8493, 인천지방법원 2015고단612, 창원지방법원 2015고단1116, 인천지방법원2016고단5101, 창원지방법원 2017고단4378 판결문
2. 권순민, ‘형사절차에서 아동의 증언능력과 신빙성 판단에 대한 연구: 대법원 판례 분석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제23권 제4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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