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딸 중 첫째인 이숙희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공장으로 갔다. 신순애는 아픈 아버지와 사고로 다친 오빠들을 부양하느라 고생하는 엄마를 도우려 열세 살에 일을 시작했다. 임미경은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로 인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1970년대, 그들이 모인 곳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봉제공장이었다.
아침 8시 공장에 들어가 밤 11시가 넘어야 퇴근했다. 명절 대목엔 보름간 집에도 거의 가지 못하고 사장이 나눠주는 각성제 ‘타이밍’을 먹으며 밤새워 일했다. 사회는 교복 입는 학생이 아닌 미성년 노동자를 착취할 뿐 보호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버스요금을 할인받을 수 있도록 나눠주던 회수권을 받지 못해 성인 일반 요금을 내고 타던 경험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들에게 생생한 차별의 기억이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사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은 1970년이었다. 하지만 1966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신순애는 그를 알지 못했다. ‘깡패가 죽었다’며 쉬쉬하던 사장들과 형사들 때문이다. 1975년, 스무 살이 된 신순애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유인물에 적힌 ‘중등 수업 무료’라는 문구에 노동교실로 달려가고, 비로소 전태일에 관해 알게 된다. 노동조합과의 만남은 “‘7번 시다’ ‘3번 미싱사’에서 ‘신순애’로 다시 태어난 경험”이었다. 2014년 출간한 <열세 살 여공의 삶>에서 그는 회상한다. “나는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가고 있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이혁래·김정영 감독)은 평화시장 노동자의 80%가 여성이고 그중 절반은 십대이던 시절, “어찌 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없고 가엾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던 노동교실의 여성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이들에게 노조는 친구를 만나고 억울한 이야기를 나누고 배움의 기회를 되찾고 취미활동을 함께하는 학교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1977년 노동교실을 철거하겠다는 경찰에 맞서 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은 물대포를 맞다 끌려간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북한 국경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일’과 같은 9월9일이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는 ‘빨갱이’ 프레임이 씌워진다. 차별은 유치장에서도 계속된다. 학생운동 하다 잡혀온 대학생들에게 깍듯하던 경찰은 ‘여공’에게는 욕설을 퍼붓고 구타했다. 열네 살이던 임미경은 주민등록번호마저 조작당해 소년원이 아닌 구치소에 들어간다.
연락이 끊긴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야만의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독재정권과 맞선 결과는 가혹했고 ‘간첩’으로 낙인찍힌 노조원들의 삶에는 오랜 상흔이 남았다. 부모와 형제까지 피해를 보기도, 형사들이 자꾸 찾아오는 바람에 셋집에서 수없이 쫓겨나기도, 노조활동 사실을 안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싱타는 여자들>은 찬란했던 우정과 연대, 투쟁의 순간을 당사자의 목소리로 길어 올리며 국가권력에 훼손됐던 이들의 존엄을 회복한다. 영화 개봉 뒤 이숙희와 신순애, 임미경은 KBS <아침마당>에 출연했다. 옛 동지들을 찾기 위해서다. ‘9·9 사건’ 당시 어린 나이로 고초를 겪은 뒤 연락이 끊긴 이들을 다시 만나려고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숙희는 말한다. “그들을 만나면 끌어안아주고 싶고, 우리가 그때 했던 일들이 올바른 것이고 잘 살았던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친구들의 연락을 기다린다.
최지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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