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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무기, 사실적시 명예훼손

2심에서 공익 목적 인정 안 된 ‘배드파더스’성폭력 ‘저질렀다’와 ‘당했다’ 동일하게 처벌대상 되는 현행법은 타당한가
등록 2022-01-23 12:15 수정 2022-01-24 01:57
임우정 일러스트레이터

임우정 일러스트레이터

“일반적으로 법률상 허용된 민·형사상 절차에 따르지 아니한 채 사적 제재 수단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 이 사건 사이트에 적시된 사실만으로도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었다고 보기 충분하다.”

2021년 12월23일 ‘배드파더스’ 관계자 구본창씨에 대한 수원고법 제1형사부(윤성식, 강은주, 박동복)의 유죄판결(선고유예) 내용 일부다. ‘배드파더스’는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다. 구씨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비방의 목적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 즉 공익적 목적이 크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지만 2심에서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2021년 초,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5 대 4의 합헌 결정을 내렸기에 유죄로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지만, 그럼에도 2심 판결문 내용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지키려는 법익이 무엇인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사실임을 입증해도 사실적시로 처벌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의 형태를 취한다. 일단 사실을 적시했다면 그것이 실제 어떤 피해를 가져왔는지와는 무관하게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내용에는 내밀한 사생활뿐만 아니라 고소인의 가해 사실 등도 포함된다. 형법 제30조 1항, 정보통신망법 제70조 1항에 따르면, 공연히 사실을 적시할 경우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으며,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비방의 목적이 없어야)만 처벌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경우 사실임을 입증해도 사실적시로 처벌받을 수 있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

명예훼손은 반의사불벌죄(고소인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고소인의 처벌불원 의사가 수사와 재판 결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게다가 사실적시의 경우 처벌받는다고 해도 벌금형 정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개 수사 단계에서 ‘형사조정’을 권하는 일이 많고, 피고소인 상당수는 조정에 응하거나 고소인의 요구에 맞춰주며 사건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문에 명예훼손은 가해자나 권력자 쪽이 악용할 소지가 너무 많다. 다수를 대상으로 무분별한 명예훼손 고소를 남발하는 기획고소의 등장과 합의금 장사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피해 당사자가 직접 고소해야 하는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제3자 고발이 남용돼 ‘전략적 봉쇄소송’(공적 인물과 공적 사안에 대한 감시와 비판적 보도 봉쇄 목적)까지 나타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다루는 방식은 일관성이 없다. 사실적시라는 구성 요건은 흔히 ‘의견개진’일 경우 깨지는데, ‘○○는 가해자다’라는 표현을 예로 들면 어떤 수사기관은 이를 사실적시로, 다른 수사기관은 의견개진으로 판단해 기소 여부가 갈리기도 했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이 피해자가 밝히기 원하지 않았던 사적 정보(성폭력 피해 사실, 성경험 여부) 등을 유포한 것에 대해 어떤 수사관은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바뀐 수사관은 비방의 목적을 인정할 수 없는 건조한 사실의 적시로만 봤다. 공익성에 대한 판단도 교제폭력을 정보통신망법에 공론화한 피해자들 사건에서 고소인(교제폭력 가해자)의 정보공개 범위에 따라 다르게 했는데, 어떤 재판부는 너무 상세해 문제라 지적했고, 다른 재판부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익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해를 사생활로 포장하는 헌재

여성 대상 폭력의 추가 피해에 대한 법적 대응 무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나마 피해 회복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추가 가해를 하는 이들을 고소해도 처벌은 가볍고, 배상 역시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고소한 사안에서 사실적시로 고소하려 했더니 원사건(성폭력)의 결과(유죄)가 나온 상태에서 굳이 사실적시로 고소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뭐 하러 또 고소하냐며 사실상 소 취하를 수사관이 강요했던 사례도 있다. 재판으로 넘어가도 법관이 이미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에서 추가 고소를 한 피해자에게 다 잊고 새 출발을 하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형사 조정이나 합의 강요도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의 ‘명예’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조정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형법과 정보통신망법에서 규정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재조정이 필요한 명예, 즉 허명에 대해 단순히 사실을 적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제한하므로 부적절하다. 특히 범죄로 판단이 가능한 가해 행위의 경우 해당 정보가 알려지기 전과 후의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공적 인물일 때는 더 적극적으로 알려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조정이 필요한 외적 명예, 허명에 대해서도 보호 가치를 인정해 오히려 공익성을 해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존재하기에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 및 비밀에 대한 침해와 공적 판단이 필요한 행위의 구분이 더 모호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명예와 사생활의 구분이 모호해 선제적으로 모두 규제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오히려 헌재의 이런 태도가 둘의 구분을 어렵게 한다. 형사처벌 대상이 된 가해자가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폭로한 사람이 처벌받게 되어, 오히려 가해 사실을 내밀한 사생활로 포장한다. 성폭력 등 여성 대상 폭력을 개인 간의 문제, 사생활로 취급해 피해자를 공격하는 흐름을 헌재가 뒷받침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과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현행법상 동일한 사실적시 행위로 처벌 대상이 되는데 이것이 과연 합당한가? 전자는 가해자의 허명에 대한 재조정 과정이지만, 후자는 재조정이 필요 없는 사생활 영역이다. 이런 구분조차 모호하게 해버리는 것이 현재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다. 그러면 양자의 처벌은 균형을 갖추고 있는가? 처벌은 불균형하며, 피해 회복은 요원하다.

명예훼손이 아닌 명예 재조정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와 관련해 헌재도 대체 수단의 필요성을 인정한 바 있다. 현재 형법 개정안 발의도 된 상태다. 그러나 그 이상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진실한 사실을 적시해도 형사처벌이 가능한 한국에서 해당 법조는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피해 회복을 위해 기능하지 못하며 오히려 가해자, 다수자, 강자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가해를 저질러 그것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은 ‘매장’이나 ‘인격적 살해’가 아니다.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재조정하는 과정인 것이다. 부풀려진 명예는 허명이다.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면서도 약자, 소수자, 피해자의 인격권은 보호하지 못하는 현행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절실히 필요하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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