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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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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진주의보

등록 2021-12-11 17:00 수정 2021-12-12 11:30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2016년 내가 일하던 대중문화 매체에서 국제앰네스티와의 성평등 공동기획으로 한국 드라마 속 로맨스의 폭력적 클리셰(진부한 표현)를 다룬 적이 있다. 강제로 여성의 손목을 잡아끌거나 벽 사이에 가두고 키스하는 것과 같은 신체접촉뿐 아니라 비난, 위협, 고성, 난폭 운전 등 언어적·정서적 폭력도 포함됐다. 여성의 집이나 직장 등에 무작정 찾아가 기다리거나, 동의 없이 여러 사람 앞에서 ‘내 여자’라는 식으로 공표하는 행동 또한 일종의 폭력이다. 드라마는 사회 변화와 대중의 욕망을 비교적 기민하게 수용하는 장르이기에 요즘은 많은 남성 캐릭터가 여성 주인공과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과격한 언동을 삼가며 ‘무해함’을 어필한다.

폭력적 상황을 감내하는 ‘극사실주의’

그러나 누군가 아직도 여성의 마음을 남성이 쟁취함으로써 사랑이 이뤄진다고 믿을 때 비극은 다시 시작된다. 얼마 전 엔큐큐(NQQ)와 에스비에스플러스(SBS Plus)에서 방송되는 데이팅 프로그램 <나는 SOLO(솔로)>에선 ‘영철’이라 불리는 42살 남성이 ‘정자’라는 28살 여성을 비난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이들은 바로 전날 방송을 위한 합숙 현장에서 처음 만났고, 정자는 저녁 식사 시간에 혼자 고기를 굽는 영철에게 쌈을 한 번 싸주는 호의를 베풀었으며, 영철을 포함해 자신을 선택한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처음 데이트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철이 묻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재실 거예요?” 정자가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여러 사람과 알아가는 게 어떠냐며 좋게 넘어가려 하지만, 집요하게 ‘운명’을 들먹이던 영철은 정자가 자신을 확실히 선택하지 않자 급기야 “믿음이 깨졌다”며 불쾌감을 드러낸다. 영철의 위협적인 태도로 구석에 몰린 정자는 결국 죄송하다고 말한 뒤 이후 인터뷰를 진행하다 울먹이고야 만다.

‘직진’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이처럼 출연자 혼자 폭력적인 상황을 감내하도록 내버려두고 이를 그대로 방송하는 것이 <나는 SOLO>의 남규홍 피디가 추구하는 ‘극사실주의’인 모양이다. 2020년 그가 연출한 NQQ,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의 예능 <스트레인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 적 있다. ‘미스터 윤’이라는 출연자가 구애하던 ‘미스 김’이 자신의 감정에 그대로 따라주지 않자 자동차 운전대를 잡은 채 “나를 그딴 인간으로 봤다는 게 너무 기분 나쁘다”라고 고함 지르고 오열해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이다. 미스 김의 침착한 태도 덕분에 간신히 상황은 수습됐지만, 그 역시 정자와 마찬가지로 “기분 나쁘게 했다면 죄송하다”고 미스터 윤에게 사과한다.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만 내세우는 남성을 달래기 위해 아무 잘못 없는 여성이 사과하고, 제작진은 출연자를 보호하는 대신 이 ‘어그로’(관심을 끌려고 악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를 십분 활용해 프로그램을 알린다. 남규홍 피디는 <스트레인저> 종영 뒤 노이즈마케팅의 일등 공신이던 미스터 윤을 따로 인터뷰해 그를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조금 특이하지만 재미있는 캐릭터로 연출해줬다. 그러나 이런 방송의 거의 유일한 순기능은 ‘직진주의보’가 아닐까.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직진남’임을 자처하며 그런 자신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남자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임을 경고해준다는 면에서 말이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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