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라고 함은 사회 통념상 ‘의과대학을 졸업한 자’라는 점을 알면서도 별다른 설명 없이 의사·치과의사·한의사, 심지어 수의사까지 한 틀에 넣어 ‘의사’로 분류한 경찰청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중략) 의도하지 않았다는 게 의원실의 해명이지만 ‘약사’ 출신 국회의원이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의 성범죄를 강조하기 위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자료를 일부러 발표했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서영석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최근 4년간(2017~2020년) 성폭력 범죄자 직업별 현황자료를 토대로 ‘최근 4년간 의사 성폭력 범죄자 602명, 전문직 중 가장 많아’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2021년 9월30일 배포하자 나온 한 의료전문지의 칼럼 내용이다. 경찰청 통계 속 ‘의사’에는 (일반)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수의사가 모두 포함됐지만 직군 구별 없이 ‘의사’로 통칭해 자료를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통계에서 일반 의사의 비율, 언론에 보도된 일반 의사의 성범죄 사건 수, 판결서 인터넷 열람 등을 통해 확인 가능한 ‘성범죄 의사’의 수 등을 종합해 고려해볼 때, 의사 직군별로 세부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의사의 비중이 적지 않다. 게다가 경찰청 발표 자료에서 ‘의사’의 뒤를 이어 성범죄를 많이 저지른 것으로 나온 예술인(495명), 종교가(477명) 역시 직군별 분류를 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일반 의사들이 성범죄자 집단으로 몰린다’는 억울함만을 지속적으로 표하는 의사들의 항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산부인과 의사의 환자 대상 성폭력 사건(자궁근종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을 추가로 투여한 뒤 유사성행위를 한 혐의) 등 현직 의사에 의한 성범죄 사건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반성과 쇄신 대신 ‘오해’라며 의료법 개정안 저지에만 힘을 쏟는 의사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는 의사 등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개정안은 의료법 외의 법률 위반으로 의료인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면허를 취소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대한의사협회 등은 직무 관련성이 없는 범죄를 의료인 결격사유 및 면허 취소 사유로 규정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평등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의료법 개정안을 ‘의사면허 강탈법’ ‘의사노예 양산법’ 등으로 부르며 총력 저지에 나서고 있다. 나아가 법사위에서 심의가 보류되거나 법안이 수정되지 않으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겠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1973년부터 범죄 구분 없이 금고 이상 형을 선고받은 경우 의료인 면허를 취소하는 사유로 규정했으나, 2000년 의료법 개정 이후 면허 취소 범죄 범위가 ‘허위진단서 작성 등의 형법상 직무 관련 범죄 및 보건의료에 관한 범죄’로 제한됐다. 즉 의료인이 살인, 성범죄 등 일반 형사범죄를 저질러 금고 이상의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의사면허에는 영향이 없게 된 것이다.
변호사도 ‘금고 이상’이면 자격 상실또한 면허 재교부 금지 기간이 지난 의료인은 별도의 심의 절차 없이 보건복지부가 면허를 재교부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강력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들이 개명하거나 근무 지역을 변경하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 의료 행위를 지속하고 있지만 환자들은 그에 대해 알 방법이 없다. 성범죄를 저지르면 면허 정지 등의 조처를 할 수 있지만, 면허 정지가 1개월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비율은 1%도 되지 않는다.1 설령 면허가 취소돼도 최장 3년이 지난 뒤 면허 재발급 여부를 심사하는데, ‘개전의 정’이 뚜렷하다고 보건복지부가 판단하면 면허를 다시 내준다. 그 ‘개전의 정’이라는 것은 반성문만 내면 거의 예외 없이 인정되며, 그렇게 면허를 재발급받는 의사가 신청자의 98%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2, 3
변호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변리사, 법무사 등 다른 직군은 범죄 구분 없이 금고 이상 형을 선고(집행유예, 선고유예 포함)받으면 자격을 상실한다. 게다가 ‘금고 이상’이라는 기준은 과도한 기준으로 볼 수 없다. 의협 회장 선거가 한창이던 2021년 초 의협 게시판에 ‘면허강탈법 개정시 향후 의사면허 취소 적용 사례 예시’가 올라왔는데, 늘 내세우던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양육비 채무 불이행 등까지 언급해 실소를 자아냈다. 심지어 성범죄 관련해서 산부인과·소아과 등 필수과 의사들이 무고, 협박을 당하거나 합의금 등을 요구하는 범죄행위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법사위에 계류된 개정안에도 의료의 특수성을 고려해 직무 관련한 업무상 과실치사·과실치상 등에 대해선 법 적용을 제외하는 등 다른 직군과의 형평성 측면에서 여전히 혜택을 받는 측면이 있음에도 말이다.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직무 관련성과 규제 주체에 대해 차이가 있지만, 형사사건 유죄 전력을 면허를 교부하지 못할 중대 사유로 보거나, 의료행위와 관련 없는 살인, 성범죄 등을 면허 취소 사유로 정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은 의사법에 따라 의료 관련 범죄는 물론 벌금 이상 형사처벌을 받은 의사에 대해 면허 취소를 할 수 있게 돼 있어 우리보다 기준이 더 강하다. 미국 대부분 주에서는 형사 사건의 유죄 판결을 직업윤리에 반하는 행위로 보고 면허를 정지 혹은 취소할 수 있으며, 미국 주정부의료위원회연맹에서는 의료 소비자 보호를 위해 각 주에서 징계 조처를 받은 의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4
의협은 이제 ‘강력범죄’를 저질렀을 경우로 한정해 의사면허 취소 등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산부인과 의사 사건과 관련해서도 자체 징계 움직임을 보이며 자율 정화의 가능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은 의사의 경우 특수성을 고려해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면허 취소 사유에서 제외하는 등 다른 직군에 비해 여전히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현 개정안보다 면허 취소 대상 범죄를 더 제한할 필요가 없으며, 개정안에 따르더라도 다른 나라와 달리 면허 영구 박탈 등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적어도 현 개정안대로 통과돼야 한다고 본다. 자율 정화 가능성 역시 회의적이다. 의협이 주장하는 자율징계권은 의료계가 자정 능력이 있고 사회적 신뢰를 받을 때라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다.
코로나19 유행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제 역할 이상을 하는 의료인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의료인이 저지른 성범죄 사건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의료인에게 더 강력한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의사들도 직업윤리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무너진 신뢰를 쌓아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의료법 개정은 그 시발점에 불과하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1. 2014~2018년 최근 5년간 의사 성범죄 검거 현황, 2019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남인순 의원 국정감사 자료
2. 2015~2019년 최근 5년간 의사면허 재교부 신청 및 신청결과, 2019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기동민 의원 국정감사 자료
3. ‘의사 면허 취소돼도… 반성문 한 장이면 복귀’, 2019년 10월2일 MBC 보도
4. ‘의사의 중대범죄 시 의사면허취소 관련 일본 및 미국 입법례’, 2021년 6월29일, 국회도서관 <최신외국입법정보>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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