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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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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무서운 게 없던 ‘2차 가해자’들에게

박재동 성폭력 피해자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 엄벌 의지 보여줘
피고인, 약식명령보다 7배 넘는 벌금형 받아
등록 2021-03-13 08:20 수정 2021-03-31 13:45
2018년 2월26일 에스비에스(SBS)의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 보도 화면. SBS 8 뉴스 갈무리

2018년 2월26일 에스비에스(SBS)의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 보도 화면. SBS 8 뉴스 갈무리

“피고인은 자신의 범행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피해자가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허위진술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피고인에 대해 이 사건 약식명령에서 정한 벌금형(70만원)보다 훨씬 더 중한 형(벌금 500만원)을 선고함이 타당하다.”

2021년 2월18일, 만화가 박재동의 지인이자 전 국회의원 비서관이었던 박아무개씨가 정식 재판을 청구한 명예훼손 사건의 1심 결과이다. 약식명령보다 7배 넘는 벌금형의 선고는 앞서 약식명령보다 2배의 벌금형(100만원→200만원)이 선고됐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전 비서 어아무개씨의 ‘2차 가해’ 사건과 더불어, 성폭력 가해자의 지인들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저질러온 2차 가해에 대한 법원의 엄벌 의지를 보여준다.

‘불이익 변경 금지’ 믿고 정식 재판 청구 남발

성폭력 피해자들은 2차 가해에 대해 ‘형법상 혹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사실적시/허위사실적시), 모욕, 성폭력처벌법상 비밀준수 위반 등’으로 고소·고발한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그동안 그 언행의 맥락이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판단해왔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경우 형사조정으로 넘겨 당사자끼리 해결하라고 강요하거나, 혐의도 극히 일부분만 인정했다. 그것도 기소유예나 약식기소로 끝냈다. 민사소송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길어지는 재판으로 인한 고통만 피해자에게 더해질 뿐이다. 손해배상 금액이 피해에 비해 너무 적거나, 승소해도 배상금을 받지 못해 실질적인 피해 복구로 이어지지 못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이런 2차 가해자 전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 정식재판이 진행되는 경우 재판부가 신중히 판단한다. 2018년 이후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이 일부 완화돼 피고인의 정식재판 청구 사건의 벌금액 상향이 가능해졌다. 불이익 변경 금지란 피고인이 상소한 사건에서 원심보다 중한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한다. 그래서 약식명령에서 벌금형을 선고했다면 정식재판에서 징역형으로 높이는 게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벌금액을 올릴 수는 있다. 이를 토대로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른 피고인의 재판에서 재판부가 벌금액을 높이는 판결을 지속적으로 내리고 있다. 아울러 민사소송에서도 형사상 벌금액과 비슷한 수준으로 설정되던 손해배상금액이 조금씩 상향되고 있다.

“왜 당신이 나서야 했나” 물은 재판부

만화가 박재동의 지인 박씨의 2차 가해 사건의 연대 요청이 들어왔을 때, 정식재판에서 약식명령보다 상향된 벌금형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다. 이미 2019년부터 박재동이 SBS를 대상으로 진행한 정정보도청구 등을 계속 모니터링해왔기에 박재동 지인들의 2차 가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박씨의 경우 ‘박재동이 거짓 미투를 당했다’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소송 관계인이 아닌데도 피해자 증인신문조서, 판결문 등 재판기록물을 유출, 왜곡해 게시해왔다.

명예훼손 형사재판에서는 우선 관련 내용이 사실인지 의견인지를 살핀다. 이후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따진 다음 비방 목적 여부를 점검한다. (이 사건은 피고인 박씨가 무죄를 주장하면서 피해자 증인신문이 결정된 상태였기에 사실관계 입증부터 피해자가 다시 감당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싸우기를 선택한 피해자 눈높이에 맞춰 대응책을 마련하는 게 연대자의 몫이다. 고소장, 공소장, 피해자 진술조서 등 각종 수사·재판 기록물에 대한 분석, 공판을 모니터링한 결과물을 토대로 증인신문에 대비했고 관련 의견서와 탄원서를 작성했다. (거기에 ‘비방의 목적’과 관련해 재판부가 상황과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박씨와 만화가 박재동의 친분, 허위게시물 고의성 입증 자료 등을 준비했다.)

‘검사 주신문―피고인 쪽 반대신문―재판부 신문―검사 재주신문’ 등으로 피해자 증인신문이 이어졌다. 피해자는 사실관계에 대해 가감 없이, 현재를 기준으로 기억나는 대로 진술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말고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는 게 내 연대 전략인데, 그것이 피해자에게 적합했다. 그 외 피고인 쪽 변호인의 반대신문에 맞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다듬은 공판검사의 적극적인 참여가 인상적이었다. 통상 명예훼손이나 모욕 사건의 경우 공판검사가 사건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소사실과 관련된 신문을 하는 정도에 그치곤 한다. 재판부 역시 증인인 피해자나 피고인 쪽 발언 모두 경청하면서 적극적으로 질의했다.

피고인 박씨는 피해자의 고발이 ‘이해관계에 기반한 거짓 미투’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피해자가 특정 이해관계나 단체 등의 비호를 받으며 가해자를 음해, 모함한다는 주장은 성폭력 가해자 지인들이 피해자를 공격할 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이 사건에서 박씨도 동일한 논리를 내세웠다. 가해자와 그 지인 스스로 피해자 위치에 놓은 뒤 그들을 대리할 사람을 내세우는 방식. 만화계 내부의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박씨에게 ‘왜 당신이어야 했나’라는 재판부의 질문은 그래서 나왔다. 박씨는 유명인사들이 외부 공격을 두려워해 본인이 나섰다고 했으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그 주장을 일축했다.

36개월 만에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인정

박씨의 1심 선고 일주일 뒤인 2월25일 대법원은 1차 가해자 박재동이 제기한 민사소송에 대해 심리 불속행(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것) 기각 결정을 내렸다. 2018년 5월 시작한 민사소송이 피해 폭로 후 36개월 만에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이를 바탕으로 피해자는 1차 가해자와 2차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싸움을 지속할 생각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고발, 고소 후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현행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가해’에 대해 제대로 된 사법적 판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수사기관에서 기소까지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수사관들은 2차 가해가 피해자의 인격과 삶을 얼마나 갉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일부 변화가 감지되지만 법원도 여전하다. 입법적 보완과는 별개로 진행형의 싸움을 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단죄와 피해 회복을 위해 수사기관, 법원의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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