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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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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들어서자 여학생들은 쑥덕거렸다

마그네슘염은 ‘주사’ 가능성 제시하는데 이후 논의되지 않아
공판 시작되고 주사 자국 등 검찰·변호인 모두 인정했지만 사망시각은 공방
등록 2021-02-21 14:39 수정 2021-03-03 07:16
사망 전날 김성재가 데뷔 무대 리허설을 앞두고 동료 가수들에게 자신에 대해 묻는 모습. 이 자리에서 ‘녹색지대’ 곽창선은 “성재씨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 슬펐다”고 말해 묘한 뉘앙스를 자아냈다(왼쪽). 유튜브 방송화면 갈무리

사망 전날 김성재가 데뷔 무대 리허설을 앞두고 동료 가수들에게 자신에 대해 묻는 모습. 이 자리에서 ‘녹색지대’ 곽창선은 “성재씨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 슬펐다”고 말해 묘한 뉘앙스를 자아냈다(왼쪽). 유튜브 방송화면 갈무리

1995년 11월20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인기 댄스그룹 ‘듀스’의 전 멤버 김성재(23)가 숨진 채 발견됐다. 듀스 해체 이후 성공적인 솔로 데뷔 무대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1993년 4월 노래 <나를 돌아봐>로 데뷔한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적 바탕이 록이었다면, 김성재와 이현도로 이뤄진 듀스는 뉴잭스윙과 솔 등을 기반으로 흑인음악을 일관되게 추구한 뮤지션이었다. 듀스를 한국 힙합의 원조라고 하는 이유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26년이 됐다. 그 무심한 세월 동안, 김성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김성재 변사 사건이 대한민국 연예계 최대 미제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경찰은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킨 살인, 강도 등 강력사건 가운데 6개월 이상 지났는데도 피의자를 검거하지 못한 사건을 실무상 미제사건으로 본다. 대검찰청의 2019년 범죄통계를 보면, 살인 총 발생 건수 849건(기수·미수 모두 포함) 가운데 808건에서 피의자를 검거했고, 41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김성재의 유족은 오늘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가장 격이던 큰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범인이 누구인지,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탓에 온전히 망자를 떠나보낼 수조차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당시 수사에 문제점은 없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김성재 변사 사건은 경찰 초동수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표적 사례다. 사건을 미궁 속으로 빠뜨린 당시 검시제도의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 증언을 배척하거나 채택하는 등의 문제 또한 유효하다. 모두 김성재 변사 사건으로 짚어봐야 할 공익적 가치다.
지난 1년6개월여 동안,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수사·공판 기록과 당시 신문·잡지 기사 등 3천 쪽 넘는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당시 수사기관·법원 관계자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유족과 지인들을 만났고 법의학자와 의사들의 조언도 구했다.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된 김성재 전 여자친구 쪽 변호인들도 수차례 접촉했다. 이제 26년 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죽음의 진상을 들여다본다. _편집자주
연재 순서

① 운명의 밤
② 오른팔의 주사 자국
③ 누가 부검을 반대했나
④ 진정서와 동물마취제
⑤ 제보자와 황산마그네슘
⑥ 누락된 증거와 첫 공판

주요 등장인물
K 김성재 여자친구
안원식 서울서부지청 검사
김완섭·배용범 K의 변호인
배○○ 반포동물병원장
정희선 국과수 약독물과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감정서에 편철된 분석결과지. 증3호(피부조직 약 20g)에서 마그네슘염이 175.9ppm 검출됐다고 나와 있다. 소변(281.5ppm) 외에 피부조직에서도 적지 않은 마그네슘염이 나온 것으로 타살 가능성을 높여주는 새로운 증거였지만, 공판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감정서에 편철된 분석결과지. 증3호(피부조직 약 20g)에서 마그네슘염이 175.9ppm 검출됐다고 나와 있다. 소변(281.5ppm) 외에 피부조직에서도 적지 않은 마그네슘염이 나온 것으로 타살 가능성을 높여주는 새로운 증거였지만, 공판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1995년 12월20일 수요일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약독물과장 정희선이 사체 피부조직 약 20g에서 175.9ppm의 마그네슘염을 찾아냈다. 소변(281.5ppm), 혈액(67.8ppm) 외에 피부조직에서도 적지 않은 마그네슘염이 나온 것이다. 황산마그네슘이 검출되지 않았다며 타살 가능성을 일축하던 K의 변호인에게 맞서 마그네슘을 검출해낸 것도 정희선이었다. 앞서 김성재 사체에서 동물마취제(졸레틸50)를 발견해 이 사건의 향방을 바꿔놓은 정희선은 이번에 또 한 번 중요한 증거를 찾아냈다.

동물병원장 “졸레틸은 사람도 마취할 수 있다”

입으로 투여된 약물은 위에서 검출된다. 피부조직에서 마그네슘염이 발견됐다는 것은 주사로 투여됐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낸 한 마취과 전문의는 “피부조직에서 마그네슘염이 검출됐다는 것은 황산마그네슘을 주사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며, 졸레틸50과 함께 투여했다면 상승작용이 발생해 마취 효과가 더 커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수술할 때 황산마그네슘을 사용하면 마취제를 덜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황산마그네슘은 마취제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사용한다. 병용 투여했을 경우 충분히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라고 덧붙였다. 1심 공판에 변호사 쪽 증인으로 참석한 법의학자 이광수는 마그네슘염의 치사량을 260~420ppm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K의 변호인은 2월17일 <한겨레>로 보낸 내용증명을 통해 “K가 구입한 황산마그네슘 3.5g은 치료약의 범위 내로서 이를 희석하여 3cc 주사기로 수회 나누어 투여하더라도 인체에 거의 해를 주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사체 피부조직에서 마그네슘염이 175.9ppm이나 검출됐다는 사실은, 훗날 공판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듯하다. 1·2심 공판기록과 판결문 어디에도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는데다, 당시 수사 핵심 관계자도 이 사안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혐의를 입증할 책임이 있는 검찰이 중요하고 핵심적인 증거 하나를 간과한 것일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경찰 수사결과 보고를 보면, 반포동물병원장 배○○은 K에게 졸레틸50과 황산마그네슘을 팔면서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기르던 개를 안락사 시키려 한다는 K에게 “개가 움직이니까 졸레틸을 근육에 주사하고 마취되면 황산마그네슘을 정맥에 주사하라”며 “졸레틸은 사람도 마취할 수 있고 정맥에 주사시 30초면 마취되나 근육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1

12월21일 목요일, K의 변호인 박○○은 서울지법 서부지원(현 서울서부지법)에 피의자 K에 대한 구속적부심을 청구했다. 박○○은 청구서에서 “김성재가 11월15일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K의 선물을 사오는 등 두 사람이 줄곧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와 별다른 살해 동기를 찾을 수 없다”며 “K의 구속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틀 뒤 서부지원 민사합의2부(재판장 김기수) 심리로 열린 구속적부심에서 K의 청구는 “이유 없다”며 기각됐다.

수사에선 경찰 출신이, 재판에선 판사 출신이

달포 뒤인 1996년 1월11일 박○○은 사임계를 제출했다. 이후 서울민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 김완섭(연수원 4기),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 배용범(연수원 10기)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 구속 단계에선 경찰 출신 전관 변호사를, 1심 단계에선 지법 부장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것이다.

한편 당시 검사 안원식은 자신이 수사한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공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외과의사 L(당시 33살)이 자신의 아내인 치과의사와 1살짜리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 사건은, ‘한국판 O. J. 심슨 사건’이라 불리며 초미의 관심 속에 1심 공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원식이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이어 김성재 사건까지 연이어 맡은 것은 두 사건이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5개월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 사건은 △양측성 시반 형성 등 사망추정시각의 다툼과 △살해 동기 여부 △경찰 초동수사 부실로 인한 직접증거 부재 등에서 너무나도 흡사했다. 사건 발생 지역도 서울 은평구와 서대문구로 인접했다. 결정적 물증 없이 공판이 이뤄진 것도 공통점이었다.

1995년 12월30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태평로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2층에서 김성재 추모공연이 열렸다. 룰라, 알이에프(R.ef), 김건모, 솔리드, 노이즈, 강수지, 디제이디오시(DJ DOC) 등 인기 가수들이 성재의 넋을 위로했다. 수익금은 전액 추모비 건립에 쓰였다. 성재가 없는 1996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안원식은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피의자 K에 대한 공소장을 제출했다. 1996년 1월4일 목요일이었다. 공소사실에는 그동안 경찰과 검찰에서 진행한 수사 결과가 담겼다. 검찰이나 변호인 모두 인정하는 사실은 주삿바늘 자국, 마그네슘염 검출 등 9가지였다.(표 참조)

안원식은 이를 바탕으로 혐의 입증 전략을 세웠다. 김성재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이제 재판에서 그날의 진실이 밝혀질 터였다.

2월8일 목요일 오전 11시, 첫 공판이 서울지법 서부지원 303호 대법정에서 형사합의부(재판장 손용근, 주심 박익수) 심리로 열렸다. 공판에는 피고인과 검사 안원식, 변호인 김완섭, 배용범이 참석했다. 법정에는 20여 명의 기자가 취재 경쟁을 벌였다. 10대 중반 팬들, 서부서 경찰들도 방청석에 자리했다.

피고인은 검찰 심문에서 피해자와 단둘이 거실에 남아 있었던 점은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와 줄곧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김성재를 결코 살해하지 않았다”고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첫 공판은 25분 만에 끝났다. 다음 공판은 2주 뒤로 잡혔다. <한겨레> 등이 첫 공판을 사회면 1단 기사로 보도했다.

당시 사건 현장 구조도. 숙소에 투숙한 이후 거실에서 김성재와 함께 잠자던 매니저 L은 사건 전날 백댄서 류노아의 권유에 따라 안방에서 잠을 잤다. 서부경찰서 수사결과보고서

당시 사건 현장 구조도. 숙소에 투숙한 이후 거실에서 김성재와 함께 잠자던 매니저 L은 사건 전날 백댄서 류노아의 권유에 따라 안방에서 잠을 잤다. 서부경찰서 수사결과보고서

닮은꼴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2차 공판은 2월23일 금요일 오전 10시, 서부지원 303호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도 피고인 K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피고인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방청석에 자리한 김성재의 10대 팬들은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다. 법정 경위가 제지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재판장은 다음 공판기일을 알리며 서둘러 재판을 마쳤다.

이날은 같은 법원에서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의 1심 선고도 있었다. 서부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손용근)는 치과의사인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L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고 피해자의 사망시간에 대해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다툼이 있지만, 범행 장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흔적이 없고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에 피고인이 숨진 피해자와 같이 있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피고인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고 범죄 수법이 잔혹해 극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법정 최고형이 내려지면서 유사한 김성재 사건 공판에도 관심이 더해졌다.

3차 공판은 3월8일 금요일 오전 10시에 열렸다. 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은 10대 중반 여학생 30여 명이 방청석 곳곳을 메웠다. 2차 공판 때 학생들의 소란 행위로 곤욕을 치른 법정 경위가 재판에 앞서 학생들에게 주의를 줬다. 절대 녹음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당시 법정을 스케치한 기사는 피고인이 법정에 들어서자 여학생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도 사인을 둘러싸고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피고인이 동물병원장에게 졸레틸50 등을 산 이유와 그것을 숨기려 한 것에 대해 검사의 날 선 추궁이 이어졌다. 변호인은 동료들이 각자의 방에 있던 순간에 거실에서 여성의 몸으로 살해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피고인이 김성재에게 주사 놓는 것을 본 목격자나 직접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못한 상황에서 상식선의 의심이었고 상식선의 반론이었다. 쟁점은 피해자 사망시각이 새벽 3시40분 이전인가 이후인가, 그리고 피해자의 사망 원인이 졸레틸50으로 인한 것인가였다.

한국 법의학의 대부로 알려진 이정빈 서울대 의대 교수(법의학교실)도 검찰 쪽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교수는 황적준 고려대 교수와 함께 ‘법의학 1세대’로 불린다. 이 교수는 28개의 주사 자국이 피해자가 생존했을 때 시간적으로 밀접하게 연달아 주사된 것으로 보이고 사망시각은 11월20일 새벽 3시 이전이며 그 이후일 가능성은 낮다고 증언했다. 이날 법정에 선 황 교수도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시50분 이전에 사망했다. 2시50분 이후에 사망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고인과 변호인들은 줄곧 피고인이 숙소를 나오던 3시40분 무렵에 김성재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망시각은 3시40분 이후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체에서 검출된 약물의 혈중농도로 키 180㎝의 건장한 남성이 사망할 수 없고, 더 나아가 피고인이 졸레틸50을 구입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투여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1심 변호인들의 변론은 이처럼 치사량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날 공판에선 학생들의 소동은 없었다. 재판장은 다음 공판기일을 알리며 재판을 마무리했다. 변호인들은 치사량과 관련된 검찰의 프레임을 깨기 위해 전문가 증언 준비에 착수했다.

동물병원장은 진술 번복하고 캐나다로

4~5차 공판은 3월26일 같은 날 오전과 오후로 예정됐다. 이날 공판에서 용의자 체포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동물병원장 배○○이 졸레틸50과 황산마그네슘 판매 시점과 관련해 진술을 번복했다. 이후 그는 돌연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오승훈 <한겨레> 기자 vino@hani.co.kr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리얼리Zoom-듀스 김성재 변사 사건 ⑦법의학 vs 법의학로 이어집니다.

각주
1. 배○○ 경찰 진술, 서부경찰서 수사결과보고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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