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 간에도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고향 부모님 뵈러 가는 길은 조심스럽고, 자식들 얼굴 보러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젠 ‘민족 대이동’이란 말도 농경사회 유물로 남을 판입니다.
그래서 <한겨레21>이 ‘우동뉴스’(우리동네뉴스)를 준비했습니다. 명절에도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겨레> 전국부 소속 기자 14명이 우리 동네의 따끈한 소식을 친절하고 맛깔스럽게 들려줍니다. 고향 소식에 목마른 독자에게 ‘꽃소식’이 되길 바랍니다. _.편집자주
2021년 1월19일 <한겨레> 1면에 실린 사진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서울역 광장의 노숙인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두툼한 점퍼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주고 사라진 한 남성의 사진. 이 사진은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남기에 바빠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만 내뱉는 우리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따스한 마음을 가진 분들을 더 찾고 싶었습니다. 물론 커다란 패널을 들고 찾아와 사진 찍고 기부하는 기업들도 훌륭하지만, 나보다 어려운 분들을 위해 써달라며 두툼한 돈봉투를 무심히 동 주민센터에 던져놓고 가거나, 남몰래 쌀 몇 포대를 쌓아두고 사라지는 분들, 그러면서도 한사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번 들어보실 래요?
1월27일 아침 7시,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에 20㎏짜리 쌀 300포대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습니다. 무려 11년째 설 전에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양으로 기부하는 쌀입니다. 매년 이맘때 월곡2동 주민센터에 ‘며칠 몇 시에 쌀을 보내주신대요. 어려운 분들께 전해드리래요’라는 전화가 온답니다. 양이 워낙 많아 배달 시간에 맞춰 주민센터 직원들과 주민 40명이 동원돼, 트럭에서 쌀을 내리고 직접 배달까지 합니다. 매년 이 기부 소식을 전하는 성북구청 홍보전산과 박수진 계장은 이분을 ‘천사’라고 부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상황인데 보내줘 천사한테 미안하고, 또 안 보내주면 혹시 천사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했을 텐데, 올해도 어김없이 보내주셨네요.”
11년째 같은 방법으로 기부하는데 ‘천사’의 꼬리가 밟히진 않았을까요? “우리라고 왜 안 궁금했겠어요. 전화한 분께도 캐물은 적이 있는데 이분도 대리인이라고. 트럭을 몰고 오신 운전사가 아닐까 의심했는데, 그분도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올해는 배송하는 분도 바뀌었고, 봉화 쌀에서 다른 쌀로 배송됐네요.” ‘천사’가 누구인지는 막연히 추측만 할 뿐입니다. “월곡2동에 살다 형편이 나아져서, 향수 때문에 보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죠.”
2020년 12월11일 서울 양천구 신월6동 주민센터에도 5㎏짜리 쌀 200포대가 전달됐습니다. 당시 전화를 받은 정경주 양천구청 주민협치과 팀장은 말합니다. “은행 직원이 택배로 물건이 갈 것이라고 말씀하더라고요. 어려운 이웃한테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왜 콕 찍어 신월6동이었을까요? “원래 신월6동에 사시던 분이 아니었을까요? 홀몸 노인들께 반찬 기부하러 오시는 어떤 분도 이 동네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이제 살 만해져서 먼 곳에서 일부러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주민센터를 통한 익명 기부는 형편이 나은, 동네에 대한 ‘향수’가 있는, 타지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2020년 12월 중순 서울 도봉구 창4동 주민센터에도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주민의 전화가 걸려와 10㎏짜리 쌀 20포대가 배달됐습니다. 그 전화를 받은 정상구 주무관이 말했습니다. “주민센터와 나라로부터 많은 복지 혜택을 받아서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요. 뭐가 제일 필요하냐고 묻고는 쌀을 보내주셨습니다. 전화한 번호를 찾아보니 이 지역에 사는 주민이셨어요.”
1월11일엔 은평구 신사2동 주민센터에 “혼자 사는 70살 넘은 할머니”께서 “은평구에 어렵게 혼자 사는 노인이 많다는데, 자주 가는 마트에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식품 위주로 주문·배송할 테니 잘 전해달라”는 연락이 왔다는군요. 이분이 주문한 식품은 라면·즉석식품·보리과자 등이었다고 합니다. 마트 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58만원어치 정도 된답니다.
주민센터에 기부된 현금이나 물품은 어떻게 쓰일까요? 일단 지역 사회보장 관련 단체들이 주민센터와 협의하는 단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차원의 논의를 거쳐 우선순위를 나눕니다. 그 뒤 사회복지 공무원·주민의 손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 분배됩니다. 현금 기부의 경우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등의 논의를 거쳐 물품 구매를 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2020년 12월 종로구 숭인2동 주민센터에 익명의 기부자가 “지난 1년 동안 차곡차곡 모았다”며 전달한 100만원이 든 돈봉투는 동네 저소득층 50가구에 따뜻한 목도리가 되어 전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익명의 기부자들은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주민센터를 선택할까요? 구청 공보담당자들이 설명합니다. “주민센터처럼 주민들 상황을 잘 아는 곳도 없거든요. 사회복지 전달 체계의 맨 마지막이어서 어디에 누가 살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죠.” “주민센터가 찾기도 쉽고 열린 구조잖아요. 돈봉투 같은 것을 놓고 사라지기도 쉽습니다, 하하.” 종종 복지 사각지대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나마 어려운 주민을 잘 파악하는 것은 동 주민센터란 얘깁니다.
익명의 기부자는 왜 주민센터를 택할까얼굴 없는 천사들과 주민을 이어주는 자치구 공무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익명으로 기부하시는 분들이 좀더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흐뭇하기도 하고요.”(신월6동 정경주 팀장) “주민센터에서 7년을 근무했지만 익명 기부 전화는 처음 받아봤거든요.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더라고요. 일방적으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다는 점에서 아직 우리 사회가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창4동 정상구 주무관)
2021년에는 얼굴 없는 천사 덕분에 우리 동네가 포근해졌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서울=박태우 <한겨레>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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