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엽니다. 11월27일 나오는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고민으로만 채웁니다.
*[조주빈 검거 비망록 ①] ‘n번방’ 지옥문을 열어젖힌 사람들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556.html
-올가 토카르추크, <낮의 집, 밤의 집>
“틀을 벗어나는” 사이버 범죄의 특징을 설명하겠다고,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 수사과장이 사무실 벽에 걸어놓은 지도 앞에 선다. 먼저 가리키는 건 세계지도다. “국경이 없다.” 뒤이어 전국지도, “관할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 지도를 짚으며 싱겁게 맺는다. “이건 내 고향 구례. 수구초심.”
사이버 범죄 앞에 사건의 육하원칙은 다시 쓰여야 했다. 어디서? 피해자는 서울, 거제, 동해에 있고… 또한 어딘가 신고조차 못한 채 있다. 가해자는 인천(‘박사’), 안성(‘갓갓’) 등에 있었지만, 잡고 나서야 알았다. 어쩌면 캄보디아에 있을지도 몰랐다. 박사는 텔레그램에서 한동안 캄보디아에 사는 사업가인 양 굴었다. 피해와 가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 또한 모든 시간에 있다. 성착취물이 담긴 화면을 여는, 마우스 휠을 내리는, 재생 단추를 누르는 밀리초와 밀리초 틈새에서 가해는 무한히 반복된다. 피해자가 배포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피해는 시작된다(
각주 2). 2019년이 한 달 남짓 남았다. 경찰은 전국적인 수사를 시작했다.경북청은 n번방을, 강원청은 주로 ‘제2의 n번방’으로 부르는 프로젝트n방 등을 수사했다. 서울시경은 박사방 사건을 전담한다. 가해와 피해의 공간이 무의미하다면, 단서도 관할 구분 없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대개 피해자 신고지를 기준 삼는 ‘관할’을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도 수사 관행이 견고하다. 박사방 사건만 해도 관할 경찰서별로 낱낱이 흩어져 제 맥락을 못 찾고 있다. “다른 경찰서 사건을 받아오면 종결까지 받아온 경찰서가 해야 하니까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안 좋아하죠. 그런데….” 유나겸 팀장이 조승노 수사관을 슬쩍 본다. “조승노 수사관님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전국에 있는 박사 관련 사건을 최대한 끌어오자’고 하셨어요. 그래야 단서를 잡는다고.” 조 수사관의 표정은 대개 그렇듯 의뭉스럽다. “말은 시원하게 했지. 처리 못하면? ‘난 몰라’ 하려고 했어.”(조승노 수사관)
서울시경이 전국 경찰서에서 끌어온 사건은 20여 건이다. 서울시경으로 접수된 10여 개 사건까지, 30여 건 수사기록을 합치니 1만 쪽을 훌쩍 넘겼다. 한장 한장 넘겨가며 단서를 찾았다. 서로 다른 아이디를 쓰더라도 동일 인물로 의심되면 칠판에 적었다. 지시하고, 따르고, 요구하고, 실행하는 인물 사이 관계도 그려봤다.
피해자나 공범 진술에서 공간이나 시간이 등장하면, 역시 적었다. 적힌 것은 검증한다. 검증하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다. 영장을 청구하려 기록을 짊어지고 서울중앙지검을 하루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 오갔다. 두어 명이 달라붙어 손수레에 1만여 쪽 수사기록을 담아서 차에 싣는다. “중앙지검 들어가려면 또 계단 올라가야 하잖아요. 나르다가 상자라도 터지면, 어휴.”(최지훈 수사관)
검증해보고 별 연관이 없는 것들은 지우고 다시 새로운 단서로 칠판을 채운다. 수사관들은 꾸벅꾸벅 존다. “잠은 4시간 정도. 아, 쪽잠 포함이요.” 강길병 수사관은 대개 책상에 엎드려 잤다. 이민상 수사관은 다른 수사관과 대화하다가 중간에 잠든다. “저는 대화가 끝난 줄 알고 잠깐 눈 감은 건데….”
그러니까 결국 “수사를 밑바닥에서, 오프라인에서 했다”(조승노 수사관)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기업 협조가 없어도 “어떻게든 잡긴 잡는다.”(최종상 과장) 다만 유나겸 팀장은 플랫폼 기업의 협조가 아쉽다. 본사 위치마저 알 수 없는 텔레그램이야 이미 포기한 상태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국내 플랫폼 기업에 보낸 압수수색 영장은 감감무소식이다. 늘 벌어지는 일인데, 다급하고 절박하니 야속함은 더했다. “영장 처리에 보통 한 달, 늦을 때는 두 달까지 걸려요.” 수사 초기 단서 하나를 포착하고 어느 IT 기업에 가입자 정보를 내줄 것을 요청하는 영장을 보냈다. 미뤄지고 늦춰졌다. 결국 “정보가 자동 삭제돼서 내줄 방법이 없다고 했어요.”(유나겸 팀장) 잡고 나서 알았다. 결정적 단서였다. 플랫폼 기업만 탓할 일은 아니다. 플랫폼의 책임과 자유, 개인정보 보호, 수사기관의 영장 청구 관행,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시간은 흐르고 있다. 해를 넘겨 1월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잠잠하다. ‘부따’ ‘태평양’ ‘김승민’ ‘랄로’까지 박사 공범 4명이 잡혔다. 그뿐이다. 박사는 텔레그램 안에서 여전히 경찰을 조롱한다. 잡히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박사X한겨레’ 방을 만든다. 김완 기자를 조롱하고, ‘한겨레에서 인증받은 가해자’임을 과시한다. 가해는 멎지 않는다. 무력감은 한층 더한다. “수사 도중에도 새로운 피해자가 생길 때 제일 분하고 무기력했어요.”(이민상 수사관) 지옥은 계속되고 있다. 깨달은 이들만 외롭고 처절하다.
*[조주빈 검거 비망록 ③] 드디어 수갑을 채우다 기사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558.html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고한솔 기자 sol@hani.co.kr
각주 2.“종래 형법은 물리적 가해와 피해 행위가 드러나지 않거나, 또는 그 익명성과 기술적 장벽 때문에 입증이 어려운 사이버공간상에서 가해와 피해를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다.”(김한균, ‘디지털성범죄 차단과 처단’)
* 기사에 담긴 소설의 문장은 거장 혹은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여성 소설가의 소설에서 따왔다.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그려온 앨리스 먼로와 올가 토카르추크는 각각 2013년,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2019년 맨부커상을 탔다. 작가 사후 20여 년 만에 세계 출판계에 알려진 구묘진의 <악어 노트>는 성소수자(LGBTQI) 문학의 전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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