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등장하는 피해 사례는 사전에 당사자 허락을 모두 구하고 썼음을 밝힙니다.
“진짜가 아니잖습니까.”
1년 전 20대 피해자 ㄱ씨가 주변인으로 추정되는 가해자가 저지른 디지털성범죄의 단서를 들고 찾아간 경찰서에서 경찰에게 들은 말이다. 텔레그램에서 일어난 일이라 가해자 특정이 어렵고, 피해자 모습이 과장·왜곡되어 ‘가짜’임이 분명하므로 수사해봤자 처벌이 어렵다는 것. “아가씨가 예뻐서” “그러니까 에스엔에스(SNS)에 사진 올릴 때 조심해야 한다”며 피해를 축소하다 못해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수사관 앞에서 ㄱ씨는 절망했다.
충청권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ㄴ씨는 6개월 전 친구의 디지털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고 증거를 수집하다 본인의 피해도 인지했다. 의식 없는 상태로 강간당하는 다른 여성의 몸에 본인 얼굴이 합성된 영상물을 본 ㄴ씨는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다. 자신을 돕다가 피해를 알아챈 ㄴ씨를 보며 친구는 더 괴로워했고, ㄴ씨는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도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들’로 인해 또 한 번 상처를 입었다. 부모도, 학교도, 경찰도 모두 어차피 잡지 못한다며 다른 데 정신 팔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수년간 연대활동을 하며 만났던, 허위영상물 등을 이용한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가짜’이기 때문에 피해를 인정받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유출하고 일상 사진을 이용해 허위영상물 등을 만들어도 그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짜’인 불법촬영물이나 성착취물 피해 사건도 텔레그램 등을 이용하면 잡기 어려운데, ‘가짜’인 사건은 더 어렵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한다. 주변 모두를 의심하고, 본인이되 본인이 아닌 사진·영상을 보고 고통을 느껴도, 피해는 축소되고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딥페이크를 이용한 디지털성범죄는 2024년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연인, 가족, 지인 등의 개인정보를 늘어놓으며 언어성폭력을 일삼던 세대가 있다. 디지털 환경이 구축되자 글이 이미지로 확장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세대를 막론하고 가해자들은 불법촬영물 등을 올리고 피해자 신상정보를 늘어놓으며 ‘품평’하다 기술이 발달하자 ‘××능욕’이라는 이름의 디지털성범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기 시작했다. 익명성과 강력한 보안을 앞세운 텔레그램, 다양한 방식의 합성이 가능한 딥페이크 등 기술 발달은 이런 흐름과 연결돼 10대, 20대의 ‘놀이화된 범죄 문화’로 뿌리내렸다.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드냐” “일기장에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 “자기만족” “나 혼자 즐기는 것” “예술작품” 등의 망언은 2020년 3월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나왔다. 당시 국회의원, 법무부 차관,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 모여 딥페이크 기반 디지털성범죄를 자족적 개인 일탈로 치부하며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2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결과가 4년 뒤인 지금이다. ‘반포할 목적으로’라는 목적범 조항, 소지·시청의 불처벌, 제작 의뢰 등 처벌 공백이 그때 시민사회가 우려한 대로 현재 10대·20대 범죄자, 피해자를 양산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조지호 경찰청장은 2024년 9월2일 국회에서 검거 인원 중 75%가 10대이며, 20대까지 포함하면 95%라고 밝혔다.)
그뿐인가. 각 분야 전문가, 시민들이 모여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의 균형을 모색하며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던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태스크포스(TF)는 2022년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 취임 뒤 반강제로 해체됐다. 세계 각국이 딥페이크 기술 등을 이용한 디지털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국제 공조를 위해 각종 협약을 맺으며 노력하는 사이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제 책임을 다할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엔(n)번방’ ‘박사방’ 등 일당 일부만 본보기로 잡고 처벌했던 수사기관과 법원은 또다시 느슨해졌다.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을 가해자들이 갖게 된 원인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낸 2022년 사이버폭력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처벌이 약해서”(26.1%), “붙잡힐 염려가 없어서”(22.3%) 디지털성범죄가 확산한다고 답변한 10대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10대, 20대는 자신들의 행위가 ‘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으나 ‘잡히지 않을 것’이고 ‘잡혀도 처벌이 약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상과 미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기꺼이 놀이처럼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자위 영상 등 본인의 신체촬영물까지 보내며 범죄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통제·과시욕 등을 충족하려 애쓴다. 거기에 수익 창출까지 보장된다는 인식이 더해진다. 한국의 다음 세대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2024년 6월4일, 서울중앙지법으로 갔다. ‘서울대 텔레그램 집단 성폭력 사건’으로 알려진 허위영상물 등 제작, 반포 사건의 첫 재판이 열렸기 때문이다. 피해자 ‘루마님’, 추적단불꽃 원은지(언론인), 피해자 곁을 지키는 이들과 변호사들의 노력 끝에 겨우 법정에 세운 가해자 일부의 재판이다. 506호 법정의 특성상 피고인 박아무개는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채 방청객이 드나드는 문으로 들어왔다. 법정을 가득 채운 사람을 본 뒤 피고인은 덜덜 떨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선처받기 위한 ‘쇼’가 시작된 것이다. 피고인 쪽은 허위영상물 등 제작 교사 혐의를 부인했고, ‘심신미약’을 내세웠다. 본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는 취지로 호소했다. 피고인 박아무개의 나이는 40살이다.
서울대 출신 40대 남성도 범행 동기를 정신적 문제로 돌리는데, 그보다 어린 가해자들은 어떻겠는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텔레그램 채널과 대화방 속 범죄를 무분별하게 접하면서 이를 모방한 이 사건 범행들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며 법원이 ‘어리고 미숙한 가해자들’을 선처하는 사이 피해자들은 철저히 소외된다. 재판도 ‘얼마나 실제에 가까우냐’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면서, ‘가짜’ 같은 피해자의 영상·사진은 피해가 축소된다. 자신의 얼굴에 다른 피해자의 신체가 합성된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은 죄책감까지 떠안는다. 피해자들의 피해와 고통마저 ‘가짜’ 취급을 받는다.
“제 피해는 ‘진짜’고 아직 ‘진행형’입니다.” 1년 전 수사기관 문턱에서 좌절했던 ㄱ씨가 다시 고소를 준비하며 나중에 의견 진술할 때 할 말이라고 전달한 것이다. 혼자였던 그 곁에서 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무료법률지원사업 등을 소개하며 조력하고 있다. ㄴ씨와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부모와도 연락했다.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 같이 고민하기로 했다. 이렇게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노력에 사회가 답해야 한다. 피해자는 ‘가짜’가 아니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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